형극의 삶[이준식의 한시 한 수]〈181〉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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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위로 날마다 쏟아지는 비, 옛 초나라 땅에 찾아든 소슬한 가을.

거센 바람에 나뭇잎 지는데, 밤늦도록 담비 갖옷을 움켜잡고 있다.

공훈 세울 생각에 자주 거울 들여다보고, 진퇴를 고심하며 홀로 누각에 몸 기댄다.

위태로운 시국이라 임금께 보은하고픈 마음, 쇠약하고 병들어도 그만둘 수 없지.

(江上日多雨, 蕭蕭荊楚秋. 高風下木葉, 永夜攬貂구. 勳業頻看鏡, 行藏獨倚樓. 時危思報主, 衰謝不能休.)

―‘강가에서(강상·江上)’ 두보(杜甫·712∼770)

주룩주룩 가을비 쏟아지는 남쪽 지방 어느 강변의 누각. 추풍에 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시인은 밤늦도록 가죽 외투를 쥐고 있다. 언제든 조정의 부름에 응할 수 있다는 충일한 자신감일 테다. 그래서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며 공훈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하지만 거울에 비치는 건 젊은 날의 기개에 찬 모습이 아니라 ‘쇠약하고 병든’ 현재의 모습. 시인의 고뇌가 깊어진다. 무기력한 자아와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자아가 서로 갈등하는 지점이다. 이 갈등으로 빚어진 마음의 결손(缺損)을 도무지 채울 수 없는 이 밤, 시인은 ‘홀로 누각에 기대어’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스스로 더 이상 나라를 위해 기량을 발휘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느끼면서도 차마 그 좌절감을 자인하지 못하는 회한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패기와 공명심으로 점철된 젊은 날의 찬란한 광휘가 아스라이 추억으로 묻히고 마는 쓰라린 경험을 감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는 시인의 말년 무렵인 55세 때 쓴 작품. 청년 시절 도처를 만유(漫遊)하고 폭넓은 독서와 교유를 통해 삶의 지혜를 터득한 두보이지만, 끝없는 구직 활동과 방랑, 전란과 질병 등 겹겹의 장애 앞에서 그는 형극(荊棘)의 삶을 살아야 했다.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형극의 삶#강가에서#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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