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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광화문에서/황규인]5·18의 광주 야구장, 그 시적 정의에 관하여

입력 2022-05-18 03:00업데이트 2022-05-18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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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서울서 우리 (한)기주 보러 오셨능가?”

소변기 앞에 나란히 선 사내는 여태 오줌만큼 궁금증도 참았다는 듯 이렇게 물었다. 광주 무등구장 관중석 뒷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였다. 야구장은 기본적으로 ‘여럿이 놀러 가는 곳’이다. 그러니 혼자 스케치북처럼 생긴 공책(야구 기록지)에 볼펜 색을 바꿔 가며 낯선 기호를 채워 넣기 바쁜 앞자리 주인이 궁금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본인도 혼자 야구장을 찾았으니 마침 말동무도 필요했을 거다.

한기주(35)는 아직도 프로야구 신인 선수 최고액인 계약금 10억 원을 받고 그해 광주 연고 팀 KIA에 입단한 투수였다. 프로 생활만 KIA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광주에서 나고 자란 ‘본토박이’였다. 광주 팬들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게 당연한 일. 그러나 이날 안방경기에서는 이제 롯데 감독이 된 서튼(52)에게 홈런을 맞는 등 1회에만 3실점한 뒤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2회부터 이상화(42)로 투수가 바뀌자 사내는 “여까지 멀리 왔는디 아쉬워 어째쓰까나”라며 녹차 섞은 소주잔을 내밀었다. 한입에 비운 잔을 돌려주자 사내는 양동시장 통닭 한 조각을 권했다. 통닭 다음에는 이름이 오갔고 결국 ‘민증’ 확인까지 마치면서 사내는 ‘성님’이 됐다. 이후에도 KIA 타선이 0의 행진을 이어가자 성님은 관중석 한쪽을 가리키며 “애기들이 없어서 그런가 오늘은 영 힘을 못 쓰는구먼”이라고 말했다. 성님이 가리킨 쪽에는 치어리더가 일렬로 앉아 있었다.

KIA는 그날 결국 1-6으로 졌다. 성님은 경기가 끝난 뒤 ‘(이)종범 성’이 자주 찾는다는 육전 집으로 동생을 안내했다. “울 아부지가 5·18 유공자”라는 이야기에 동생은 궁금한 걸 묻고 또 물었다. 성님은 자랑하듯 “우리 광주는 말이여”로 시작하는 답변을 이어가다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야구 기록지 위에 전화번호를 휘갈겨 쓴 뒤 서둘러 가게를 나섰다.

이로부터 16년이 흘러 ‘꼭 연락하고 지내자’던 약속은 거짓말이 됐고, 한기주는 결국 대구 팀 삼성에서 은퇴했으며, 스러져가던 무등구장 역시 으리으리한 챔피언스필드로 바뀌었지만, KIA가 해마다 5월 18일 안방경기 때 응원단을 운영하지 않는 건 여전히 그대로다. KIA는 지난해 이날 광주일고 출신 신인 투수 이의리(20)를 앞세워 ‘의리의리한 데이’라는 마케팅 행사를 진행하려다 여론 뭇매에 뜻을 접기도 했다.

황지우 시인은 5·18민주화운동을 광주일고와 대구 경북고의 야구 경기에 빗댄 뒤 “광주일고는 져야해! 그게 포에틱 자스티스야.”/“POETIC JUSTICE요?”라고 썼다(‘5월 그 하루 무덥던 날’). 5월 18일 광주에서 KIA가 응원 받지 못하는 팀이 된 것도 시적(詩的) 정의(正義)일까. 성님과 만난 그날부터 KIA는 5월 18일에 치른 12경기에서 4승 8패(승률 0.333)에 그쳤다. 지난해 꼴찌 한화도 승률 0.371(49승 12무 83패)은 올렸다. 올해 5월에는 다시 그 육전 집에 가봐야겠다.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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