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개천에서 가붕개로 살라고? 20대도 성취감 느끼고 싶다” [인터뷰]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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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논객 임명묵 씨의 ‘요즘 20대’

1990년대생은 86세대의 자녀 세대다. ‘86세대 용퇴론’에 대해 임명묵 씨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으면 80, 90대 넘어서도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40대에도 내려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990년대생은 86세대의 자녀 세대다. ‘86세대 용퇴론’에 대해 임명묵 씨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으면 80, 90대 넘어서도 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40대에도 내려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이진영 논설위원
이진영 논설위원
《선거를 앞두고 20대가 이렇게 주목받은 적이 있었나. 대선 후보가 청년 보좌역의 쓴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힙합 차림에 청년들과 댄스 배틀을 벌인다. 연간 100만 원의 청년 기본소득, 사병 월급 200만 원, 청년 전담 부처 신설과 학자금대출 50% 탕감 등 청년 민심을 겨냥한 맞춤 공약도 푸짐하다.

20대의 표심이 주목받는 배경엔 정치 성향의 급변이 있다. 20대는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2007년 대선(이명박 대통령 당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진보 진영의 후보를 선택했다. 그런데 지난해 4·7 재·보궐선거에서는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에게 몰표를 줬다. 더 이상 정치 무관심층도 아니다. 대선을 거듭할수록 투표율은 증가 추세다. 30대와 함께 ‘스윙보터’로 분류되는 20대의 몸값은 더 올라가고 있다. ‘20대 현상’의 이해를 돕기 위해 90년대생 논객 임명묵 씨(28)를 만났다. 그는 요즘 20대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투쟁성’을 꼽았다.》

‘개천의 용’ 꿈 무너져 집단투쟁

―20대가 투쟁적이라고?

“20대의 전장(戰場)은 온라인이다. 다양한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세력 싸움에 몰두하고 있다. 남초 커뮤니티와 여초 커뮤니티 사이의 갈등은 현실 세계에 영향을 줄 정도로 격해졌다. 대중문화 콘텐츠 소비도 투쟁적이다. 팬클럽들의 조직적인 음원 스밍 총공(스트리밍 총 공격), 경쟁 아이돌 그룹에 대한 공격 등이 투쟁적인 문화 소비 경향을 보여준다. 요즘 웹툰과 웹소설은 경쟁 승리 지배 복수를 다룬 내용이 많은데 주 소비층이 20대인 것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왜 투쟁적이 된 건가.

“사회의 불평등이 심화하고 지위 세습 경향이 강해졌다. 내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 더 나은 삶을 개척할 수 있다는 신화가 무너진 것이다. ‘수저계급론’과 부조리한 사회를 쓸어버리겠다는 ‘죽창론’이 나온 배경이다. 게다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24시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쟤는 부모 잘 만나 저렇게 사는데 나는 왜 이럴까’ 한숨 쉬고 ‘금수저’나 ‘인싸’들과 끝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비관하게 됐다. 계층 이동이 어려워진 사회에 대한 불만과 SNS로 인한 불행감이 상호작용하면서 집단적 투쟁성을 끌어올렸다고 본다. 좌절 질시 체념 분노가 빚어낸 심리적 스트레스를 젠더 간 싸움과 대중문화 소비로 표출하고 있다. 한류의 성공은 좌절된 자아들의 대리만족 활동에 힘입은 것이다.”

정부의 中대응방식에 불만 커


―비슷한 처지의 미국 밀레니얼 세대는 40%가 사회주의를 선호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의 20대 남성들은 보수 성향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 밀레니얼 세대가 좌경화되고 있다기보다는 전통적인 양당 체제 바깥에서 좌우 포퓰리즘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한국 20대 남자들도 보수 성향으로 바뀐 게 아니라 엘리트 기득권을 상징하는 현 집권세력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20대는 2008년 광우병 사태,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2011년 무상급식 논쟁을 겪으며 진보 성향이 됐다. 2017년 대선에서도 관성적으로 진보 진영을 따라갔는데, 취업난도 그대로이고 집권 세력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 데 대해 실망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도 보수보다는 깨끗하다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2019년 조국 사태로 그 방어선마저 사라졌다.”

―20대의 눈에 비친 보수는 어떤가.

“참신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현 집권 세력에 대한 반감에만 의존한다. 86세대, 페미니즘, 중국에 대한 반감과 적개심만 이용해 지지를 얻는다면 집권을 하더라도 현 정부의 실패를 반복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20대 표심에 영향을 주는 주요 변수는 무엇이라고 보나.

“20대 남자 기준으로 말하면 젠더 이슈와 중국 북한 문제다.”

―안보관은 보수 성향인 건가.

“대체로 20대 남자들에게 북한은 한민족이 아니다. 좋은 점이 하나도 없는 독재국가 말썽쟁이, 우리한테 시비 걸고 우리의 젊음을 2년간 군대에 바치게 만드는 그런 존재다.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이 반감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중국은 왜 싫어하나.

“기성세대는 홍콩 영화나 ‘삼국지’ 같은 중국의 소프트파워가 작동했던 시절을 살았다. 그런데 우리 세대는 중국을 처음 접한 통로가 인터넷의 ‘대륙의 기상’ 시리즈였다. 민둥산에 녹색 페인트칠을 해놓은 사진은 ‘대륙의 녹화사업’, 파란색 짝퉁 운동화를 신었다가 발에 퍼렇게 염료가 묻어나온 사진은 ‘대륙의 나이키’라는 제목으로 확산됐다. 그런 사진들을 보며 중국을 후진적인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을 압도하는 중국의 위상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미세먼지, 서해 불법 조업, 한국 고유문화 침범도 중국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그런 중국에 친화적이고 심하게 말하면 굴종적인 대응을 하는 현 정부가 불만스러운 것이다.”

존경할 정치인 없어 ‘오락가락’


―이번 대선에서 2030을 ‘스윙 보터’라고 한다.

“정치적 성향이 고착되는 과정에는 성취의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노년층의 시대적 과제는 산업화였고 중년층은 민주화였다. 박정희와 김대중 같은 상징적인 정치 세력들에 자기 힘을 보태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고 자부하면서 그 정치 진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의 20대를 동원할 만한 정치적 비전은 없고, 이를 상징하는 정치인도 없으니 정치 성향이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몰라 방황한다는 뜻인가.

“그렇다. 앞선 세대는 선망하는 모델 국가도 있었다. 일본이나 미국처럼 되겠다는 목표를 정해놓고 그 나라를 추격하는 것이 발전의 동력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따라할 만한 나라가 없다. 일본도 선망하지 않는다. 20대들 사이에서 반일 감정이 옅어진 이유도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서일 것이다. 한류의 위상을 보라. 웬만한 건 우리가 더 잘하는 것 같다. 해외여행을 많이 하고 유튜브에서 각 나라를 소개하는 콘텐츠들을 보면서 선진국에 대한 환상도 사라졌다. ‘가서 보니 별것 없더라’는 식이다. 우리의 문제는 다른 선진국도 동시에 가지고 있거나, 선진국의 정책이 좋아 보여도 우리와는 맥락이 전혀 달라 적용할 수 없겠다는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

에너지를 분출할 출구가 없다


―대선 후보들이 앞다퉈 청년 공약을 내놓고 있다. 20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한때 ‘가붕개론’이 유행한 적이 있다. 너도나도 개천의 용이 되려고 애쓰며 힘들게 살지 말고 그냥 예쁜 개천을 만들어 가재 붕어 개구리로 만족하고 살자는 주장이었는데 호응이 없었다. 한국인은 정적이고 주어진 자리에 만족하며 편하게 사는 것보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역동성을 좋아하지 않나. 젊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성취감, 노력하면 미래를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을 원한다. 이 끓어넘치는 에너지를 분출할 출구가 필요하다. 그게 막히니까 청년층에서 부정적인 에너지가 쌓이고 있다. 지금 20대는 그들이 가진 증오와 불만을 자극해 대리만족의 대상이 돼줄 수 있는 포퓰리스트 정치인과 궁합이 가장 잘 맞을지도 모른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나아질까.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데 대선 후보들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다. 이번은 과도기적인 선거이고, 다음번 대선에서는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인물이 나왔으면 한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마치 우리 세대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며 자조하듯 미국 철학자 에릭 호퍼의 아포리즘 모음집 ‘인간의 조건’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했다.

“필요한 것은 모두 바로바로 채워야 하고, 세계의 문제는 즉석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세대가 후대까지 남을 만한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런 세대는 가장 현대적인 기술을 갖추고 있어도 본질적으로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고 만다. 자연을 경외하면서 주술사가 하라는 대로 복종할 것이다.”

임명묵 씨는
1994년생.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대학원(석사과정)에서 서아시아 지역학을 공부하고 있다. 덩샤오핑 시대에서 시진핑 시대로의 전환을 다룬 ‘거대한 코끼리 중국의 진실’(2018년), 90년대생의 시각에서 한국 사회를 진단한 ‘K를 생각한다’(2021년)를 썼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20대 논객#임명묵 씨#요즘 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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