年 500만 원 면역항암제 1억 원으로… “건보 적용 안 되면 죽을 판” [박성민의 더블케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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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 항암제 본인부담 논란
내년부터 신포괄수가제 관리 강화

10년째 요관암을 앓고 있는 김모 씨(55·여)는 지난달 담당의사에게서 “현재 처방 중인 약을 중단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4년 전부터 쓴 면역항암제 키트루다의 경과가 좋아 딱히 약을 바꿀 이유는 없었다. 종양 크기도 2.5cm에서 더 자라지 않았다. 김 씨는 내성이 생겨 약효가 없어진 줄 알고 덜컥 겁이 났다. 그런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병원 측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의 ‘신포괄수가제 적용 변경 안내’ 지침 때문이라고 했다. 내년부터 2군 항암제 등의 급여 기준이 강화돼 건강보험 지원이 중단된다는 내용이었다.

김 씨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지침 그대로 적용된다면 치료비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었다. 그는 2년 전부터 건강보험 지원을 받아 회당 약 600만 원인 약값의 5%만 부담하고 있다. 하지만 3주에 한 번씩 투약하는 키트루다가 비급여로 처방되면 연간 1억 원 넘게 든다. 그동안 치른 약값 수억 원을 대느라 아파트까지 처분했던 김 씨 사정을 알고 병원 측이 키트루다를 계속 투약할 생각이 있는지 물었던 것이다.

보건당국은 김 씨 같은 처지에 놓인 암환자들의 불만이 커지자 일단 한 발짝 물러났다. 보건복지부는 이달 9일 “기존 환자는 지원을 계속할 계획”이라며 절충안을 내놨다. 그러나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내년 1월 이후 암 진단을 받거나 해당 항암제를 처방받는 환자들은 약값을 전액 부담해야 한다. 김성주 한국암환자권익협의회 대표는 “돈 없는 환자는 치료를 포기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 신포괄수가제가 뭐길래…

이 같은 혼란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보려면 신(新)포괄수가제를 살펴봐야 한다. 신포괄수가제는 환자 입원료, 검사비, 약제비 등은 포괄수가로 정해진 만큼만 지불하고, 의사의 수술과 시술 등은 ‘행위별 수가’로 지불하는 제도다. 현재 567개 질병군을 대상으로 98개 의료기관에서 운영하고 있다.

2009년 시행된 신포괄수가제는 처음에는 국립중앙의료원을 비롯한 국·공립병원만 참여했다. 그러다 2018년 민간 의료기관으로 확대되고, 2019년 4대 중증질환(암 심장 뇌혈관 희귀난치 질환)까지 신포괄수가가 적용되면서 ‘빈틈’이 생겼다. 신포괄수가제 참여 의료기관에서 급여 대상이 아닌 약제에도 본인부담률 5%를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의료기관은 더 많은 환자를 유치하려고 이를 적극 홍보하기도 했다. 폐암 투병 중인 이모 씨(54)는 “다니던 종합병원에서 신포괄수가 적용 병원에 가보라는 권유를 받고 올 8월부터 (약값 5%만 내고) 항암제 옵디보를 투약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신포괄수가 참여 병원과 고가(高價) 항암제 처방 환자가 늘어나자 고가 약제를 포괄수가 안에 묶어두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2019년 2군 면역항암제 등을 ‘전액 비포괄’로 전환했다. 전액 비포괄은 행위별 수가제의 급여 기준을 따른다는 의미다. 급여 범위의 약 처방이면 환자는 비용의 5% 또는 일부만 부담하고, 급여 범위 밖이면 전액을 부담해야 한다. 가령 키트루다를 비소세포폐암 2차 항암제로 처방하면 약값의 5%만 부담하지만, 급여 대상이 아닌 암에 쓰면 전액을 내야 한다.

○환자 “줬다 뺏나”, 정부 “원칙대로”

복지부와 심평원은 “혜택을 축소하는 게 아니라 현장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원칙대로라면 급여 대상이 아닌 환자들이 세부 지침 미비와 현장 혼선으로 혜택을 봤으니 다시 정상화시킨다는 의미다.

암 환자들 사이의 형평성을 맞춘다는 뜻도 있다. 같은 질환도 신포괄수가 적용 병원인지, 입원했는지, 얼마나 오래 입원했는지 등에 따라 진료비 본인 부담이 천차만별이어서다. 심평원 관계자는 “제도의 허점을 노리고 불필요한 입원 치료를 받아 고가의 면역항암제를 처방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암 환자들은 제도의 허점을 만든 것도, 본인부담률이 제대로 적용되는지 모니터링을 게을리한 책임도 심평원에 있다고 주장한다. 논란이 인 뒤 ‘신포괄수가제 항암제 제외 대책회의’를 만든 강지영 씨(42·여)는 “환자들이 신포괄수가 적용 병원으로 몰리는 것은 당연했다”며 “예상보다 고가 항암제 투약 환자가 많아져 재정에 부담이 되니 갑자기 혜택을 없앴다”고 지적했다.

신은숙 심평원 포괄수가개발부장은 “신포괄수가제 자체가 아직 시범사업으로 운영되고 있어 불합리한 점은 계속 개선하고 있다”며 “최적 모형을 찾아가는 단계”라고 말했다.

○신약 급여 확대 딜레마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그래픽=강동영 기자 kdy184@donga.com
이 논란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고가 신약 급여화를 둘러싼 해묵은 갈등이 보인다. 환자 요구만큼 고가 항암제를 건강보험으로 지원할 수 있다면 논란은 불필요하다. 그러나 정부는 한정된 건보 재정을 고려해 급여 우선순위를 따질 수밖에 없다.

정부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로 항암제 급여 혜택이 꾸준히 늘었다고 설명한다. 심평원에 따르면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항암제 급여 기준 확대로 환자 8만3845명이 2597억 원의 혜택을 봤다. 항암제 건강보험 청구액은 2017년 1조1719억 원에서 지난해 1조9131억 원으로 3년 만에 63.2% 증가했다.

하지만 말기 암 환자들의 체감은 다르다. 해외에선 효과가 인정돼 더 싸게 쓸 수 있는 약제가 한국에선 급여화가 지체돼 수억 원을 내야 할 때도 있다. 형편이 어려운 환자는 치료를 포기하거나, 뒤늦게 치료를 받게 된다. 키트루다가 대표적이다. 안진석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키트루다는 폐암 2차 치료제로 사용할 때만 급여 지원이 된다. 1차 치료부터 써야 5년 이상 장기 생존율이 더 높아지는 등 효과가 크지만 급여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키트루다는 현재 1차 치료 급여 적용을 논의 중이다. 올 7월 4년 만에 암질환심의위원회를 통과했지만 약제급여평가위원회 추가 심의 등을 거쳐야 한다.

○“5% 룰 깨고, 급여 항목 조정해야”

정부와 의료계, 환자단체는 암환자들이 더 쉽고 빠르게 신약에 접근할 수 있도록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대안 마련은 쉽지 않다.

의료계는 본인부담률을 조정하자고 제안한다. 본인부담률을 ‘5%’ 틀에 가두지 말고 20%, 30% 등 유연하게 적용하되 대상 약제나 환자 범위를 늘리자는 얘기다. 강진형 서울성모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초고가 신약이 쏟아지는데 현재 급여 기준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며 “건보 재정을 고려하면 5%라는 획일적 기준을 버릴 때가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환자단체 등에선 “항암제 보장성에 우선순위를 두는 건 부적절하다”며 반대한다. 정부도 “암 보장성이 후퇴했다”는 비판을 의식해 적극적으로 고려하지는 않는 분위기다.

영국 등 일부 국가에서 도입한 ‘암 기금’처럼 별도 재정을 마련하자는 주장도 있다. 강 교수는 “영국도 재정 위기를 겪으며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지속가능한 운영 방안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애련 심평원 약제관리실장은 “암 환자의 치료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특정 질환을 선정하고 그에 따른 재원을 조성하려면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위험분담제 확대를 우선 고려하고 있다. 약의 효능이나 사용량 등에 따라 약값 일부를 제약회사가 환급해주는 제도다. 하지만 급여화 등 다른 방안보다 환자 부담이 대체로 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소득에 따라 환급 비율을 조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안정훈 이화여대 융합보건학과 교수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라는 목표를 앞세우면서 의학적으로 덜 시급한 항목도 급여화된 것이 많다”며 “(항암제 급여 확대를 위해선) 보험 재정에 구멍이 없는지 전면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성민 기자 min@donga.com
#면역항암제#건보#고가 항암제#신포괄수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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