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도 반해버린 달콤한 위안[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입력 2021-07-12 03:00수정 2021-07-1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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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그림책을 본다는 것은 나는 블라우스가 정말 아름다운 옷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선뜻 사서 입지는 않는다. 옷을 사 입을 때 명심해야 할 것은, 옷이 예쁘다고 해서 그 옷을 입은 자신이 예쁘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이다. 옷을 사 입을 때는 단순히 예쁜 옷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아야 한다. 화려한 옷을 입는다고 꼭 자신이 화려해지지는 않는다.

치장도 마찬가지다. 나는 진주가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내 살결이 너무 하얗기 때문에, 내 목에 진주 목걸이가 어울릴 것 같지는 않다. 17세기 중국의 극작가이자 출판인이었던 이어(李漁)는 ‘한정우기(閑情偶奇)’라는 책에서 치장이 과하면 진주가 사람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진주를 장식하는 셈이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장식의 핵심은 균형이다.

균형이 중요하기로는 그림 전시도 예외가 아니다. 옛 그림의 경우, 역사적 배경이나 상징에 대한 해설이 있으면 한층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다. 생뚱맞고 난해한 현대 미술 작품의 경우도, 그림 옆에 요령 있는 해설문이 붙어 있으면 좀 더 감상하기 수월하다. 그러나 해설이 너무 과하거나 단정적이면, 거꾸로 작품이 그 해설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작품의 풍부한 감상의 여지가 축소되지 않으려면, 해설은 정성스럽되 담백한 것이 좋다.

그림책은 어떤가. 그림이 주인공이니 글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러야 할까? 아니면 삽화처럼 그림은 글을 장식하는 역할에 그쳐야 할까? 그림이 전면에 나서는 장르인 그림책에서 그림과 글의 관계는 과연 어떠해야 할까? 여기에 정답은 없다. 다만 그림과 글이 서로를 제약하지 않고, 담백하게 어울리면서 독자에게 풍부한 상상의 공간을 열어주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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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할머니의 팡도르’를 펼치면, 독자는 안나마리아 고치가 쓴 글과 비올레타 로피즈가 그린 그림이 손잡고 열어 놓은 상상의 공간으로 초대된다. 여기, 물안개가 자욱한 마을의 외딴집에 고요히 늙어가는 할머니가 한 사람 있다.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할머니 역시 고단한 삶을 살아왔다. 이제 그는 창밖의 풍경을 보며, 자신이 죽을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예감한다. 마침내 검은 사신(死神)이 문을 두드린다. “나랑 갑시다.”

죽음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당황하기는커녕 사신을 반갑게 맞이한다. 다만 할머니는 사신에게 며칠 더 이 세상에 머물다 가자고 간청한다. 단순히 죽기 싫어서가 아니라, 마을 아이들을 위해 과일과 계피가 듬뿍 든 크리스마스 빵을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에. 가차 없는 사신도, 할머니의 빵 맛을 약간 보더니, 그만 정신이 아득해지고 만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그림책 ‘할머니의 팡도르’ 속 그림들. 할머니의 빵을 맛본 사신의 몸에 불그레한 홍조가 돌기 시작한다. 오후의소묘 출판사 제공
빵은 생명의 음식이고, 빵 맛은 생명의 맛이고, 달콤함은 삶의 쾌락이다.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검은 저승사자답지 않게, 할머니의 기막힌 빵 맛을 본 사신은 그만 불그레 홍조가 돌기 시작한다. 예나 지금이나 붉은색은 열정적인 삶의 색깔이다. 이 세상의 달콤함에 매료된 사신은 구운 호두, 누가, 참깨 사탕, 꿀에 졸인 밤을 먹기 위해 마침내 검은색 망토를 훌렁 벗어 던져버린다.

며칠 동안 할머니 집에 머물면서 금빛 팡도르와 핫초코의 달콤함까지 모두 맛본 사신은 더 이상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자신이 없을 정도로 풀어져 버린다. 바로 이때 엄청난 반전이 일어난다. 사신이 할머니에게 해야 할 말을, 할머니가 사신에게 건네는 것이다. “이제 갑시다.”

할머니가 사신에게 며칠 동안 기다려 달라고 했던 것은, 부질없는 목숨을 그저 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은 동네 아이들, 그리고 죽음밖에 모르는 사신에게 달콤한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였던 것이다. 그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지금, 할머니는 이제 침착하게 죽음을 향해 떠날 준비가 된 것이다. 이 이상하고 빵을 잘 만드는 할머니는 삶과 죽음 둘 다 기꺼이 긍정하고 수용한다.

그러나 이 빵의 장인, 할머니가 죽고 나면 그 기막힌 달콤함도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할머니가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그 달콤한 빵들이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모든 것이 이토록 덧없어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할머니는 말한다. “찰다(cialda) 속에 레시피를 숨겨 두었으니 이제 비밀은 아이들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거예요. 이제 갈 시간이야.” 그렇다.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지만, 다음 세대에 레시피를 남길 수는 있다. 할머니는 레시피를 통해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삶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을 사용한 비올레타 로피즈의 그림은 안나마리아 고치의 글과 적절한 균형을 이룬다. 오후의소묘 출판사 제공
‘할머니의 팡도르’는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은 삶에서 달콤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 그 달콤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 죽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세대에게 달콤함의 레시피를 남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쩌면 이 세 가지가 사람이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위안의 거의 전부다. ‘할머니의 팡도르’는 단 두 가지 색―삶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색―을 사용해서 그 팡도르 같은 위안을 담백하고도 정성스럽게 독자에게 건넨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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