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보고 굴복하는 정치인, 그들이 치를 대가[오늘과 내일/이정은]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입력 2021-01-11 03:00수정 2021-01-11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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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불복 부추긴 공화 중진 의원
민주주의 훼손 낙인 이어 사임 압박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매끈한 대리석 기둥들과 붉은색 휘장이 둘러싼 대형 홀은 장엄했다. 커다란 샹들리에가 매달린 천장 돔 밑으로 미국을 대표하는 인물 36명의 대형 대리석상이 기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미국 국회의사당 ‘석상 홀(Statuary Hall)’. 워싱턴 특파원으로 부임한 뒤 방문했던 이곳에는 특별한 아우라가 어려 있었다. 국회의사당 곳곳을 소개시켜 주던 의회 보좌관의 표정이 한껏 의기양양해졌다고 느낀 곳도 거기였다. 미국 민주주의의 심장부를 보여주고 있다는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사당 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자들에게 점령당하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뭔가 중요한 것이 짓밟힌다는 느낌이랄까. 재커리 테일러 제12대 대통령의 흉상에 누군가 묻혀놓은 피는 섬뜩했다. 결국 5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비극을 불렀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기해온 부정선거 의혹과 자극적인 선동,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난무한 음모론에 ‘트럼프빠’들이 격렬하게 반응한 결과였다.

가장 큰 책임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다. 그러나 이를 막기는커녕 동조하고 부추긴 정치인들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공화당의 테드 크루즈, 조시 홀리 상원의원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6일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최종 승리 확정을 거부하겠다고 예고해 왔다. 10여 명의 공화당 의원을 끌어모아 어깃장을 놓으려 했다.

철없는 신참 정치인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자. 크루즈 의원은 2016년 공화당의 유력 대선후보였던 중진이다.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에 텍사스주 법무차관까지 지낸 법률 전문가다. 그런 그가 “선거 부정이 있었다고 믿는 국민들 앞에서 이대로 결과를 확정할 수 없다”고 한 자신의 주장이 궤변임을 모를 리 없다. 대선 결과는 각 주정부가 재검표까지 진행한 뒤 결과를 확정했고, 80건이 넘는 부정선거 관련 소송을 법원이 모두 기각하거나 각하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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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태연하게 부정선거 의혹을 계속 제기하는 데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깔려 있다는 게 언론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향후 대선 재출마를 노리고 있는 그로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가 필수적이라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극성 트럼프 지지자들의 공격 대상이 안 되려고 몸도 사렸을 것이다.

상식과 소신을 버린 결과는 참혹하다. 크루즈 의원은 ‘테러리스트들을 선동하고 쿠데타를 부추겼다’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나치의 선동가였던 요제프 괴벨스 같은 인물로 낙인찍히며 그동안 쌓아온 정치적 평판이 다 무너질 판이다. 동료 의원들에게서조차 사임을 요구받는 고립무원 처지가 됐다.

극렬 지지자들은 어디에나 있다. 이들의 주장은 때로 근거가 약하고 극도로 주관적이다. 쉽게 선동당하고 휘발성도 강하다. 정책이나 가치관 등의 이유로 표를 던진 다른 모든 지지자들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이들이 신봉하는 리더십이 어느 순간 권력에서 밀려날지 모를 일이다.

얄팍한 소수의 위세에 눌려 원칙을 외면하는 것은 책임 있는 정치인이 할 행동이 아니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정확한 사실관계를 국민에게 알리고 큰 그림을 제시하는 것, 왜곡된 신념을 이용하거나 부추기는 게 아니라 옳은 방향으로 설득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공화당의 또 다른 중진인 밋 롬니 의원은 국회의사당 난입 사건 후 6시간 만에 재개된 회의에서 “유권자를 존중하는 최선의 길은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리더십이 져야 할 부담이자 책임”이라고 역설해 동료 의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한국의 정치인들에게도 보라고 권하고 싶은 명장면이었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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