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겪고도 안바뀐 관행[현장에서/박상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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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운영자 조주빈이 3월 검찰에 송치되기 전 경찰서를 나서는 모습.
‘n번방’ 운영자 조주빈이 3월 검찰에 송치되기 전 경찰서를 나서는 모습.
박상준 사회부 기자
박상준 사회부 기자
“개인정보요? 원하면 다 볼 수 있죠. 공무원들은 신경도 안 써요.”

서울의 한 구청에서 근무하는 사회복무요원 A 씨는 20일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주빈 일당이 미성년자 등 여성 성착취물을 제작 유포한 ‘n번방 사건’ 이후 사회복무요원의 개인정보 관련 업무가 달라진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달라진 게 없다”며 돌아온 대답이다. 조주빈의 공범인 사회복무요원 최모 씨는 서울의 한 주민센터에서 근무하면서 성착취 대상으로 삼을 여성의 주소와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등을 조주빈에게 제공했다.

민원 처리 보조 업무를 하는 A 씨가 앉은 자리에는 같은 부서의 다른 공무원 PC가 놓여 있다. 이 PC를 통하면 일반인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를 언제든 열어볼 수 있다. 이 공무원이 휴가 등으로 부재중일 땐 A 씨가 맘대로 쓸 수 있다. A 씨는 “인감증명서 발급 업무도 직접 한다”고 했다.

‘n번방 사건’ 이후 병무청은 올 6월 “사회복무요원의 정보시스템 접근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비식별조치(개인정보 삭제) 등 안전성을 확보한 뒤 개인정보 업무를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또 사회복무요원이 개인정보 관련 업무를 할 때 공무원이 이를 감독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현장은 달라진 게 거의 없다. A 씨가 소속된 구청의 경우 기존에는 A 씨의 PC에 다른 공무원의 ID와 공인인증서를 깔아주고 개인정보 업무를 시키다가 이번 ‘정보시스템 접근 차단’ 방침이 나오자 아예 공무원 PC를 직접 건네주고 일을 시키는 실정이다.

서울의 한 지방법원 형사과에서 근무하는 사회복무요원 B 씨는 더욱 놀라운 얘기를 했다. B 씨는 수사기관이 법원에 제출한 서류를 정리하는 일을 한다. 서류에는 성범죄 피해자의 실명, 주소,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 등이 전혀 가려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B 씨는 기자에게 “제가 어떤 서류를 보든 감독하는 공무원은 없다”고 말했다.

병무청 방침에 따르면 사회복무요원에게 개인정보 관련 업무를 시킬 때는 비식별조치를 해야 하고 공무원이 옆에서 감독해야 한다.

사회복무요원 업무는 개인정보 처리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요원 중에는 범죄 전력이 있는 경우도 있어 철저한 관리감독이 필요하다. 신현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병무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복무 도중 범죄를 저지른 요원이 전체 6만여 명 중 40명에 달했다. 9명은 성범죄였다. 범죄 전력이 있는 요원도 200명이었다.

재판부는 조주빈의 공범 최 씨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며 “공무원이 담당해야 할 개인정보 처리 업무를 사회복무요원들에게 맡긴 잘못된 관행이 범행의 계기가 됐다”고 꼬집었다. 개인정보 관리를 허술하게 한 공무원들도 ‘n번방 사건’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공무원들의 지금 같은 관행이 계속된다면 제2의 ‘n번방’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박상준 사회부 기자 speakup@donga.com
#개인정보#n번방#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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