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둘째 주 목요일 그녀의 시가 우리에게 왔다[광화문에서/손효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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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 문화부 차장
손효림 문화부 차장
“누구지?”

8일 오후 8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77)이 선정됐다는 발표가 나자 문화부 기자들 사이에는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나온 첫마디였다. 기사 마감까지는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폭풍 검색이 시작됐다.

퓰리처상 수상, 미국 대표 시인인 계관시인에 선정, 거장에게 수여하는 내셔널휴머니티 메달 수상…. 프로필을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아…” 하는 낮은 탄식이 나왔다. 미국에서 유명한 시인인데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니. ‘깜짝 수상’이라기에는 그의 프로필이 너무나 화려했다. 세상은 넓고 미지의 세계는 더 넓구나!

학계와 출판계에서도 글릭을 모른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그의 시집은 국내에 출간되지 않았다. 그의 시 ‘눈풀꽃’, ‘애도’를 시선집 ‘시로 납치하다’, ‘마음챙김의 시’에 각각 담은 류시화 시인과 ‘헌신이라는 신화’를 수록한 시선집 ‘내가 사랑한 시옷들’을 낸 조이스 박 작가, 영미 현대문학을 전공한 교수들 정도가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하는 10월 둘째 주 목요일은 연중 문학에 대한 관심이 가장 높은 날이다. 출판계는 이를 200% 활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교보문고는 ‘2020 노벨문학상 특별전’을 기획해 1957년 수상작가인 알베르 카뮈 배지와 유력 후보인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증언들’ 북 파우치를 증정하는 행사를 열었다. 글릭이 수상자로 발표되자마자 그의 시가 담긴 시선집을 홈페이지 전면에 배치했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도 글릭 작품이 실린 시선집을 포함해 일정 액수 이상의 문학책을 구입하는 이에게 찻잔을 증정하고 있다.

출판사에도 9일부터 책 주문이 이어지고 있다. ‘마음챙김의 시’를 낸 수오서재의 황은희 대표는 “책을 찾는 독자들이 많아 서점별로 주문 사항을 확인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로 납치하다’를 낸 더숲의 김기중 대표도 “부산 영광도서에서 독자들이 계속 문의한다며 휴일인 9일에도 책이 출고되는지 물었다”고 말했다.

출판계는 글릭의 시집이 국내에 나오려면 계약하고 번역하는 시간을 고려할 때 한 달 이상은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소설의 경우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 계약금이 5배 이상 뛰는데, 시집은 이보다는 상승 폭이 적다고 한다. 시는 원작이 지닌 운율, 어감, 은유적 표현 등을 살려 우리말로 제대로 옮기는 작업이 매우 까다로워 고도의 능력을 요구한다. “시를 번역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인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 건 2011년 이후 9년 만이다. 글릭의 시는 자연과 인간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지금 발을 딛고 선 삶의 매 순간을 단단한 언어로 부여잡는다. 그의 시를 읽은 후에는 흩날리는 낙엽도, 한 잔의 차도 신비롭게 느껴질지 모른다. 이 모두 살아 있기에 누릴 수 있는 ‘운 좋은 삶’이라는 걸(‘애도’ 중) 그는 에두르지 않고 가슴에 시어를 내리꽂는다. 이 가을, 우리는 또 하나의 우주를 만나게 됐다.

손효림 문화부 차장 aryssong@donga.com
#노벨문학상#수상자#미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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