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日 제국주의 선전에 이용된 ‘가짜 중국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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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이름으로/야마구치 요시코,후지와라 사쿠야 지음·장윤선 옮김/462쪽·2만8000원·소명출판

일제가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해 세운 만주국에서 일본인임을 숨기고 중국인 여배우 리샹란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야마구치 요시코. 소명출판 제공
일제가 중국 대륙 침략을 위해 세운 만주국에서 일본인임을 숨기고 중국인 여배우 리샹란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야마구치 요시코. 소명출판 제공
일본 이름 야마구치 요시코, 중국 예명은 리샹란(李香蘭). 일제는 일본인인 그녀를 만주국에서 리샹란이라는 중국 여배우로 둔갑시켜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데 이용했다. 중국을 고국으로, 일본을 조국으로 사랑했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한평생 물음표를 가지고 살아야만 했다. 이 책은 중국에서 나고 자란 야마구치가 일제의 이데올로기 선전에 이용되다가 일본 패망 후 일본으로 돌아온 직후까지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1920년 중국 동북구 푸순에서 태어난 야마구치는 1933년 선양에서 우연히 가곡 발표회에 출연했다가 인생이 바뀌었다. 노래 실력은 물론 얼굴도 빼어난 데다 일본어와 중국어가 유창한 야마구치는 곧바로 일본 군부의 눈에 띄었다. 당시는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 이후 1932년 만주국을 설립하고 중국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던 시기였다.

야마구치는 일본 군부의 의도에 휘말려 의지와 무관하게 만주국에서 활동하는 영화배우로 전향하게 된다. 부모가 일본 영화제작사와 전속 계약서를 써버리는 바람에 그는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리샹란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인 여배우 행세를 했다. 이후에는 오족협화(五族協和·일본이 중심이 되어 구미 제국주의를 막아냄) 정책에 따라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 ‘백란의 노래’에서 그는 일본인 청년을 열렬히 사랑하는 중국인 아가씨 역을 맡았다. 훗날 일본의 한 영화평론가는 이를 “일본인의 달콤한 자부심을 만족시키는 감미로운 환상”이라고 혹평했다.

일본의 선전 영화에 다수 출연한 이력 때문에 1945년 일본이 패전한 후 그는 중국에서 매국노를 뜻하는 ‘한간(漢奸)’으로 몰려 총살 위기에 놓인다. 가까스로 일본에 살아 돌아온 그는 결혼을 계기로 영화계에서 은퇴했지만, 1969년 일본의 쇼 프로그램 사회자로 방송에 복귀하면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유럽, 중동, 동남아 지역을 다니며 베트남전쟁 취재, 팔레스타인 여성해방 운동가 인터뷰 등 세계 분쟁 지역을 다니는 준(準)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이를 바탕으로 1974년 참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한 후 환경청 정무차관을 지냈다. 특이한 점은 위안부 문제 일본 측 대표 단체인 ‘아시아여성기금’ 부총재를 지낸 것. 이를 두고 역자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 일본이 만들어 낸 가짜 중국인 배우로 활동했지만, 은퇴 후 야마구치 요시코는 외교와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저지른 전쟁 범죄에 대한 사죄에 지속적 관심을 가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야마구치 요시코로 돌아온 저자는 1987년 일본에서 자서전을 발간하며 자신의 부끄러웠던 배우 생활에 대해 고백한다. “너무 늦게 찾아온 자책감에 며칠 동안 잠들지 못했다. …과거에 찍은 ‘죄 많은’ 영화를 보면서 내가 한 일을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다. … 이렇게 리샹란에 관한 정리를 끝낸 일이 기쁘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두 개의 이름으로#야마구치 요시코#후지와라 사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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