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삶 경계 사라져” vs “일 집중않고 해이”… 재택근무 ‘新노사갈등’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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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감시” “재택도 일의 연장”
고용부 ‘재택근무매뉴얼’에도 새로운 근무방식 놓고 곳곳 마찰
명확한 기준없이 기업문화와 충돌
“합리적 근무수칙-추가비용 등 노사 대화 통해 합의점 찾아야”

“솔직히 좀 불쾌했죠. 회사가 감시하는 건가 싶었어요.”

수도권의 한 콜센터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는 A 씨는 최근 회사가 공지한 재택근무 지침에 자존심이 상했다. “근무 시간 동안 컴퓨터 카메라를 켜놓고 업무를 보고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A 씨는 한참 고민했지만, 결국 이를 거부하기로 했다. 그는 “재택근무를 하려면 지침을 준수하라는데 ‘강요’로 들렸다”며 “잠깐 화상회의를 하는 거면 몰라도, 8시간 내내 사적인 공간이 다 비춰지는 건 솔직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장기화되면서 재택근무가 일상화되고 있는 와중에,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근무 방식을 놓고 불협화음이 벌어지는 사례가 늘고 있다. 고용노동부가 16일 정부 차원에서 ‘재택근무 종합 매뉴얼’을 내놓았지만 아직 현장에서 체감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사 측이 정부 매뉴얼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근무수칙을 만들어야 하며, 직원들도 재택근무 역시 형태만 다른 근무의 일환이란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회사가 적절하고 합리적인 재택 방침 마련해야”

매뉴얼에 따르면 A 씨처럼 회사가 일방적으로 재택근무자에게 근무시간 내내 카메라 촬영을 요구하는 건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 될 수 있다. 한 노동전문 변호사는 “근로자가 원치 않는데도 이에 동의하도록 압박하는 것도 위법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급작스러운 재택근무로 인해 근로자의 ‘일과 사생활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도 회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한 신용보증기관에서 일하는 박모 씨(25)는 지난달부터 재택근무를 시작한 뒤 금쪽같은 휴일에도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잦다. 박 씨는 대출 관련 상담을 주 업무로 하는데, 고객들이 시간을 가리지 않고 문의전화를 해오기 때문이다. 박 씨는 “사무실에 있을 땐 업무 전용 전화로 상대했지만,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개인 번호를 알려줬다”며 “진행 상황을 빨리 알고 싶어 하는 고객들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너무 괴롭다”고 호소했다.

재택근무 종합 매뉴얼에서도 이런 상황은 회사가 대책을 세웠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재택근무에 필요한 장비는 사용자가 제공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밝히고 있다. 다만 사용자는 재택근무의 성격에 따라 필요성을 판단해 장비 제공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한 노무사는 “박 씨의 업무 특성상 업무용 휴대전화를 마련해주는 게 타당하다”며 “다만 사측이 전액 부담할지, 일부를 지원할지는 노사 간에 충분히 협의해서 결정하면 된다”고 했다.

○ “재택도 일의 연장, 또 다른 근무 방식”

재택근무는 근로자들만 어려움을 겪는 건 아니다. 관리직들은 “아직 생소한 방식인지라 업무의 효율성만 따진다면 아쉬운 측면이 없지 않다”고 토로했다.

아동 의류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에서 총괄이사를 맡고 있는 B 씨는 최근 재택근무자의 컴퓨터 이용 기록을 파악할 수 있는 관리 프로그램 도입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B 씨는 “아무래도 재택근무 기간이 길어지면서 직원들이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해이해지는 게 확연히 드러난다”며 “인사 측면에서라도 공평하게 업무를 평가하려면 어느 정도 재택근무에 적합한 새로운 관리 방식을 고려해야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코로나19로 회사 여건도 어렵다 보니 적절한 재택근무 환경을 제공하기 어려운 업체도 적지 않다. 조그만 무역업체를 운영하는 사장 C 씨는 “매출이 급격히 떨어진 상태에서 납품 기한 맞추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라며 “자금 여유가 없어 업무용 휴대전화 등을 마련해주지 못해 솔직히 미안할 따름”이라고 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실 재택근무는 여전히 한국에서 보편적인 수직적 기업문화와는 상충하는 대목이 많다”며 “서로의 입장만 고집하지 말고 노사가 적절한 대화와 협의를 통해서 합리적인 합의점을 찾는 게 뭣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박종민 blick@donga.com·김태성 기자

이상환 인턴기자 성균관대 글로벌경제학과 4학년
#재택근무#신노사갈등#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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