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미래에 눈뜬 현대차 노조, 강경파 넘어야 체질개선 성공[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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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 현대차 노조의 변신 시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준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투싼‘을 생산하는 모습.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제공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준중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투싼‘을 생산하는 모습.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제공
김도형 산업1부 기자
김도형 산업1부 기자
“투쟁 일변도 이미지에서 벗어나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노동운동을 실천해야 한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확실한 품질을 통해 고객들이 사도록 만드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국민과 괴리된 노동운동을 비판하는 신문 사설의 한 대목이 아니다. 올해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이 내놓은 소식지에선 이 같은 내용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강성 노조’의 대표로 꼽히는 현대차 노조가 최근 달라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앞장서 품질 개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치열한 글로벌 생존 경쟁에 힘을 보태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속에 고용 보장을 전제로 임금 인상 자제 방안까지 만지작거리는 모습이다. 하지만 노조 내외부에서 강성 기류도 만만치 않아 현대차 노조의 변화 실험이 성공할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 “울산서 현대차가 절반 이하”…노조 위기감

울산은 자타공인 ‘현대’의 도시다. 이런 울산에서도 최근 현대차 등록 비율이 50%에 못 미친다는 사실에 현대차 노조는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권오국 현대차 노조 대외협력실장은 “멀리 갈 것 없이 지역사회에서부터 사랑받는 현대차를 만드는 것이 당면한 과제”라고 말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겪으며 35명으로 결성된 현대차 노조는 지난해 말 현재 조합원 5만 명 규모로 몸집을 불렸다. 한때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으로 불리며 지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 상황과 관계없이 매년 되풀이되는 파업에 ‘귀족노조’라는 비판을 받으며 ‘철의 노동자’들은 녹이 슬어갔다.

변화는 이른바 ‘실리 성향’을 내세운 이상수 지부장이 지난해 말 당선된 이후부터 본격화되고 있다. 노조가 매주 두 차례 회사 안팎을 향해 목소리를 내는 소식지의 메시지부터 변화의 기류가 확연하다. “조합원이 배부른 귀족노동자, 안티현대로 낙인찍히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거나 “이제 노동운동은 사회적 명분과 여론을 등에 업지 않으면 필패할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현대차에서 잇따라 품질 문제가 불거지자 노조가 나서 품질 개선을 강조하기도 했다. 흠집이나 도장 불량, 단차 발생 등은 조합원의 책임일 수 있다며 품질 이슈를 노조가 주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고객들의 까다로운 눈높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이슈를 회사의 책임으로 돌리던 과거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코로나19로 판매 타격이 커지자 고용 보장을 전제로 임금을 동결한 독일 경쟁사 사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현대차 노조는 지난달 22일 임시 대의원 대회에서 기본급 12만 원 인상 등을 포함한 임금협상 요구안을 결정했다. 상급단체인 금속노조의 공통 요구안을 반영해 이런 요구안을 마련했지만 실제 협상 과정에서는 공세 수위를 다소 낮출 것으로 자동차 업계에선 보고 있다. 실제 대의원 대회에서는 코로나19 사태가 본격화되기 전에 마련된 금속노조 공통 요구안보다 낮은 인상 폭을 요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 “귀족노동자 낙인…이제 노동운동도 바뀔 때”

기자는 지난달 24일 권오국 현대차 노조 대외협력실장과 함께 울산공장을 둘러보면서 달라진 현대차 노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권 실장의 얘기와 자동차 업계의 분석을 종합하면 최근의 변화는 ‘노조에 대한 심각한 반감을 위기로 받아들인 노조의 대응’으로 요약된다.

최근 현대차 관련 기사에는 주제와 무관하게 노조에 대한 비난이 줄줄이 댓글로 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조에 대한 반감이 깊어진 가운데 와이파이 차단 논란, 조기 퇴근자 해고 조치 등이 알려지면서 비난 여론이 거세졌다. 노조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권 실장은 “자동차 품질을 향상시키고 노조와 회사의 이미지를 높이는 것이 노조에도 절실한 상황”이라고 했다. 현대차가 국내에서 소비자들에게 사랑받는 회사로 거듭나야 조합원의 일감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집행부는 기존의 노조 활동이 2020년 한국 사회에서 뚜렷한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초기의 ‘전투적 조합주의’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기금 사태를 계기로 ‘패배’한 것으로 본다. 정리해고를 포함한 구조조정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후에는 ‘실리적 조합주의’를 내걸어 임금·처우 개선 등에서 효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노조가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른바 ‘귀족노조’ 프레임을 고착화시켰다는 것이다. 자동차는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제품이다. 노조의 사회적 고립이 심화돼 현대차가 소비자로부터 외면받게 되면 회사는 물론 노조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는 것이 집행부의 고민이다.

○ 미래차 시대… “정년퇴직 할 수 있능교?”

물론 과거에도 ‘실리파’ 집행부가 들어설 때마다 투쟁 방식의 변화 조짐이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전기자동차를 비롯한 미래차 시대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울산공장 본관 앞에 테슬라의 하얀색 ‘모델3’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이 차는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미래차 기술을 살펴보자며 가져온 차다. 비록 연구차량이긴 하지만 다른 브랜드의 차량은 사실상 공장에 들어올 수 없는 현대차 상황에서 노조의 스탠스가 확연하게 바뀌었다는 점을 상징하는 사례다.

권 실장은 울산공장 조합원들로부터 “내가 여기서 정년퇴직 할 수 있능교?”라는 질문을 수시로 받는다고 털어놨다. 내연기관차 생산이 전기차 생산으로 바뀌면 일감이 20∼40% 감소할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에서 현대차의 미래와 자신들의 일자리를 걱정하는 목소리다.

전기차 시대에 대한 고민은 1, 2년 전부터 본격화됐다. 울산1공장 2라인은 이달 전기차 전용 생산 라인으로 바꾸는 공사를 진행한다. 아직 코나 등을 생산하고 있는 이 라인을 둘러보면서 권 실장은 “전반적인 차량 조립 라인은 그대로 가겠지만 엔진·변속기 생산 공장의 일감은 물론이고 엔진을 조립하는 공정도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사라지는 일감을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노조 최대의 과제인 상황. 집행부는 변화에 동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권 실장은 “우리도 서울 본사에서 항공 모빌리티 등의 사업 계획까지 내놓은 것을 유심히 보고 있다”며 “변화를 거부할 수 없으니 발목 잡지 않고 새로운 사업에서 일자리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 지금 노조의 스탠스”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30일 현대차 노조는 ‘울산자동차산업 노사정 미래포럼’ 출범에 함께 나서기도 했다. 자동차 산업 생태계 전환과 코로나19 위기 대응을 위해 네트워크 구축과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 공감한 것이다. 조선업 침체로 현대중공업이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울산시민이 2만 명 이상 줄어든 것으로 추산되는 상황에서 현대차까지 고용 충격을 받으면 울산에 이보다 몇 배 큰 타격이 될 것으로 노조는 분석하고 있다.

○ 민노총 사태 같은 내부 반발도 걸림돌

하지만 현대차 노조가 얼마나 바뀔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집행부에 정말 변화 의지가 있느냐도 문제지만 집행부가 모든 것을 이끌고 나갈 수 없는 구조적 제약도 존재한다. 내부 반발로 위원장이 밀려난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의 상황이 현대차 노조에서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민노총에서는 최근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합의안에 합의했던 김명환 전 위원장이 합의안의 내부 추인이 무산되면서 사퇴한 바 있다.

실제 울산공장 내부에서는 “노조 집행부는 ‘경영’을 하지 말고 ‘집행’을 하라”는 비판 대자보가 붙어 있기도 했다. 회사 경영에 협조하지 말고 조합원의 권익 보호에 더 집중하라는 노조 내부의 반발 기류가 있다는 것이다.

국내 최대 규모의 사업장인 현대차에는 다양한 노동운동 계파가 있고 선거를 앞두고 이합집산하면서 집행부를 선출한다. 2년 임기의 노조가 큰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조합원 수가 가장 많은 울산공장의 경우 노조 집행부도 중요하지만 각 공장을 대표하는 사업부 대표(9명)와 대의원 등의 발언력도 상당하다. 전기차 생산량의 증가가 엔진·변속기 등 일부 사업부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경우 노사는 물론 노조 내부의 갈등 요소로 떠오를 수 있다.

한 울산공장 근로자는 “밖에서 보면 당연한 변화일 수 있지만 자신들의 권익을 우선하는 현장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며 “최근 노조의 움직임을 현장에서 얼마나 수긍할지, 앞으로 임금 합의안 투표를 통해 ‘불신임’에 나서지 않을지는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울산=김도형 산업1부 기자 do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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