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습이 먹히는 이유[임용한의 전쟁史]〈120〉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7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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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사에 관한 고전인 페렌바크의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은 이런 문구로 시작한다. “1950년 6월 8일 북한 정부는 남북한을 아우르는 선거를 치를 것이며, 8월 15일 이전까지 남북한 통합 국회가 구성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문은 전쟁의 예고였지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국가 간에 전쟁을 시작한다는 것, 더욱이 그것을 기습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수만, 수십만의 대병력이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상대에게 탐지되지 않을 수가 없다.

과거에는 정보 통신이 발달하지 않아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에도 거대한 기습공격은 종종 발생했다. 1, 2차 세계대전 공히 프랑스는 독일의 침공을 대비하지 못했다. 동쪽으로 가서 독소전쟁도 그랬고, 6·25전쟁도 그렇다.

이 모든 경우에서 기습이 성공했다. 전쟁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약점을 지적당하고, 위험하다고 경고하면 더 싫어한다. 상관에게 대안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보를 알았다고 해도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전방 사단의 연대 배치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개전 직후 7사단과 2사단의 대응은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다. 2사단은 길가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지 않은 것일까, 할 수 없었던 것일까?

6월 25일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6사단은 일요일 외출을 허용하지 않아 병력이 충분했다. 포병은 포격 지점을 정확히 잡고 있었고, 예비대가 신속하게 투입되었다. 공격해온 북한군 2사단은 하루 만에 40%를 잃었다.

이제 우리는 북한보다 군사력, 경제력이 비교할 수 없이 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쟁은 숫자로, 무기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강국이 자멸하는 사례는 역사에 얼마든지 있다. 실전을 각오하고 전쟁을 대비하지 못하는 군대, 국민이 쾌락에 빠진 나라는 자신을 지킬 수 없다.
 
임용한 역사학자
#기습#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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