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편이냐” 선택 압박하는 美-中… 기로에 선 ‘전략적 모호성’[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6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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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中 갈등속 한국외교 딜레마

한기재 정치부 기자
한기재 정치부 기자
모두가 그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묘한 부담에 언급을 꺼리는 문제를 두고 ‘방 안의 코끼리’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지난달 28일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제7차 외교전략조정 통합분과회의’에도 바로 이 ‘코끼리’가 있었다. 미국과 중국의 극심한 갈등 속에서 한국 외교의 길을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열린 회의였음에도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모두 발언에 ‘미국’ ‘중국’이란 단어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날 강 장관은 “최근 고조되는 국제사회 갈등과 그 파급효과와 관련해 국내외 우려가 높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며 ‘미중 갈등’을 완곡하게 거론했다. 미중 양국에 혹시 잘못된 메시지를 보내지 않겠다는 듯 극도로 조심하는 모양새였다.

지난해 미중 사이 한국의 이른바 ‘선택’ 문제가 중국 통신회사인 화웨이의 5세대(5G) 네트워크를 사용해도 되는지에 집중됐다면 올해 양국이 한국에 건네고 있는 ‘선택지’는 더 고차방정식이 됐다. 경우의 수가 늘었을 뿐 아니라 더욱 심화됐다. 이 때문에 무턱대고 ‘전략적 모호성’에만 기댈 게 아니라 국익 우선의 외교원칙을 조속히 세워 문제가 터질 때마다 임기응변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 미중 갈등 심화 속, 韓에 날아드는 민감한 질문들
미중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급속도로 심화되는 양상이다. 갈등 전선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남중국해 세력 경쟁, 중국 기술업체들의 사이버보안 논란 등 기존의 군사 안보 경제 분야를 넘어 홍콩 문제 등 인권, 민주주의 같은 ‘가치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는 국면이다. 김성한 전 외교부 차관은 “미중 갈등이 가치 혹은 체제 논쟁으로 번지는 것은 과거와 현저한 차이 중 하나”라고 했다. 급기야 미국 당국자들은 공개석상에서 중국을 ‘중국 공산당’,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을 ‘총서기’라고 부르는 등 반중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미중 간 분위기가 이례적으로 험악해지는 속에서 한국이 새롭게 맞닥뜨린 고민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가 홍콩 국가보안법 사안이었다. 미중의 ‘체제 가치’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과거라면 굳이 받지 않았을 질문에까지 대응해야 하는 것이다.

지난달 24일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는 중국 관영 중국중앙(CC)TV 인터뷰에서 “한중 양국은 전통적으로 핵심 사안에 대해 서로의 입장을 존중해온 우호국”이라며 “홍콩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이 이해와 지지를 보낼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미국이 인권 탄압 우려로 홍콩 국가보안법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상황에서 중국 편을 들어 달라고 공개 요구한 것이다. 외교당국의 구체적 입장이 나오기까지는 싱 대사의 인터뷰로부터 일주일도 더 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외교당국은 2일이 돼서야 “(정부는) 1984년 (홍콩 자유를 보장한) 중영공동성명 내용을 존중한다”는 다소 미국에 기운 반응을 발표할 수 있었다.

지난달 중순 대만의 세계보건기구(WHO) 세계보건총회(WHA) 참가 여부를 두고 불거진 미중 갈등도 홍콩 문제와 비슷한 갈래로 진행됐다. 중국이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대만 참여를 반대한 반면 미국은 “대만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치른 2016년 이후 WHO가 대만 참가권을 박탈했다”며 대만 참여 문제를 ‘가치의 문제’와 엮어 중국을 비판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 상·하원 외교위원회 의원들이 한국 등에 대만의 총회 참석을 지지해 달라는 서한을 보낸 사실이 알려지자 외교당국은 논란을 피하기 위해 고심해야 했다. 당국은 “대만의 참석 문제는 세계보건총회의 최종 결정을 존중할 것”이라며 논란을 애써 비켜갔다.

○ 유효기간 만료 임박한 ‘전략적 모호성’
미중이 이처럼 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한국의 입장을 캐묻는 국면이 반복해 벌어지자 이젠 한국이 ‘전략적 모호성’을 더 이상 내세울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3일 이수혁 주미대사는 현지 특파원 간담회에서 “(미중에) 선택을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선택을 할 수 있는 국가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기존의 ‘전략적 모호성’ 기조에 아직 기대고 있다는 뉘앙스였다.

이에 대한 미국의 소리(VOA) 방송의 논평 요구에 미 국무부 대변인실 관계자는 “한국은 수십 년 전 권위주의를 버리고 민주주의를 받아들였을 때 어느 편에 설지 이미 선택했다”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국이 미중 간 선택을 두고 지금 저울질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해석되며, 이는 한국이 전략적 모호성을 탈피해 미국의 편에 분명히 서야 한다고 촉구하는 입장을 내비친 셈이다. 뒤이어 9일 데이비드 스틸웰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해당 국무부 논평에 대해 “상당히 잘 표현했다”며 거들기까지 했다.

최근 중국도 이에 뒤질 수 없다는 듯 공개 압박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된 홍콩 국가보안법 이슈에 대한 싱 대사의 발언 외에도 지난해 11월 추궈훙(邱國洪) 당시 주한 중국대사가 미국의 한국 내 중거리미사일 배치 가능성을 두고 “미국이 한국 본토에 중국을 겨냥하는 전략적 무기를 배치한다면 어떤 후과를 초래할지 여러분도 상상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은 중국의 예민한 시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였다.

정부는 새로운 정세에 대응할 체계적 방침을 아직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기존 전략의 유효기간이 다해 간다는 현실 인식과 문제 의식 속에서 지난해 만들어진 것이 외교부의 외교전략 조정회의지만 아직 실제 외교정책에 반영될 수 있는 수준의 구체적 성과는 나오지 않은 것이다. 외교부는 강 장관이 ‘미중’ 언급을 피한 지난달 말의 분과회의가 끝난 뒤 “올여름 (분과회의 토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3차 외교전략조정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며 “이를 통해 최근 융복합화되는 외교 사안에 대한 종합적 대응 방향을 마련해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전략 수립이 마무리되는 단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 ‘한미동맹 중심 두되, 중국 배제 피해야’
물론 외교안보 정책의 새로운 ‘대계’를 만든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을 둘러싼 미중 간 줄다리기가 향후 치열해질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정부가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을 너무 늦춰서는 안 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중 전략적 구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며 한층 격화됐다”며 “한국이 선택의 압박을 받아 모호성을 앞세울 공간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원칙을 내부적으로 정하거나 공개 발표가 유리하다면 이를 검토할 시기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했다. 김성한 전 차관은 “미 대선을 앞두고 미국이 신속한 답변을 요구하는 사안들이 있어 이에는 서두를 필요가 없으나 점차 전략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원칙을 세우는 과정에서 한미 동맹이 지지해온 전략과 가치를 살리는 동시에 중국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인상 역시 피하는 묘수를 찾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지한다는 입장에서 출발해 사안별로 입장을 구체화하는 게 좋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등 한국이 지지할 수밖에 없는 가치를 외교 원칙에 반영하다 특정 국가가 반대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겠으나 국민적 공론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원칙이란 점을 강조하며 한국에 대한 무리한 압박을 방지할 수 있을 거란 전망도 있다.

이를 위해 일부 전문가들은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의 지난해 샹그릴라 안보대화 발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리 총리는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전략에는 동의하나 역내 특정국을 배제하는 것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내 미국 주도 전략에 참여할 수 있다면서도 중국의 불만을 피할 여지를 만들었다.

이와 더불어 중국이 역내 패권에 도전하는 양상을 더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외교가 일각은 보고 있다. 이에 “한국이 미중 갈등 속에서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고 있는 주변국들과 의논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도 있다. 우리처럼 미국과 상당히 가까우나 중국에 대한 ‘봉쇄’에 가담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놓인 나라로는 일본과 인도 등이 거론된다. 미중 문제란 ‘어려운 함수’를 풀기 위해 이들과도 머리를 맞대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기재 정치부 기자 recor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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