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외모·집안이 출세에 영향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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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년 11월 14일 1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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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녹우당에서 고산을 그리다’ 출간
해남윤씨가에서 남긴 600년 기록…민간 기층의 삶 담겨

조선시대에도 외모지상주의가 있었을까. 놀랍게도 외모나 집안이 한 개인의 출세에 영향을 미치는 세태는 지금과 다르지 않다.

한국학중앙연구원(원장 안병욱)은 해남윤씨 가문에 남아 있는 5000여 점의 고문서 뭉치로 엮은 ‘녹우당에서 고산을 그리다’를 발간했다고 14일 밝혔다.

이 책은 해남윤씨가에서 남긴 600년의 기록을 바탕으로 민간 기층 삶의 단편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역사의 주인공이면서도 스스로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던 여성, 향리, 무인, 서얼, 농민, 노비 등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특히 고문서이지만 현대적으로 재조명해 누구나 읽기 쉽게 만들어졌다. 고문서는 한국식 한문과 난해한 흘림체의 초서, 난수표와 같은 숫자 배열, 전후 설명 없이 제시된 명단 등으로 해독 자체가 어려웠다.
녹우당 표지
녹우당 표지

◇고산 윤선도 등 해남윤씨의 삶으로 보는 시간여행

해남윤씨 가문은 고려 말 윤광전이 동정직에 입사하면서 관직의 발판을 마련했고 이후 노비상속 매매 등을 통해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 가문은 16세기 초 사림파 가문으로 입지를 다지면서 가세와 경제력이 급격히 신장했다. 파시조인 윤효정 때 해남의 향리였던 해남정씨의 무남독녀와 결혼하면서 재산을 축적하고 이 지역의 유력 사족과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러한 학파적·당파적 관계를 발판으로 17~18세기 초에 윤선도·윤인미·윤두서 시대를 거치면서 호남 남인 가문으로 자리매김했다.

해남윤씨 가문에 남아 있는 고문서와 고서가 약 5000점이다.

그 속에는 교육과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하려는 노력, 관료로서의 성공과 좌절, 재산을 증식하고 이를 자손에게 물려주는 다양한 형태, 바다를 개척해가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단순히 해남윤씨의 이야기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과 여성, 향리, 무인, 서얼, 농민, 노비 등과 연계되어 삶이 유지했는지에 대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나 지금이나 토지에 대한 욕망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토지 소유를 실현하는 방법만 변하였을 뿐 토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변한 것이 없다.

해남윤씨 녹우당(綠雨堂)은 경주 최부자, 구례 운조루와 더불어 ‘덕부’(德富)로 일컬어지는 대표적인 양반 지주이다.

조선부터 현재까지 격동의 기간을 거치면서도 이처럼 대지주로서 가세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온 것을 보면 누대에 걸쳐 실천한 관용과 적선 행위와 더불어 이 가문들이 지역사회와 얼마나 긴밀히 공존해왔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지역을 대표하는 대지주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말 동학농민군의 군세도 이들을 비껴갔고, 심지어 한국전쟁기 좌익 및 빨치산의 세력하에서도 침탈을 받지 않았다. 이처럼 지역 내 이들의 도덕적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양반 대지주로서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더욱 높아졌다는 사실은 그 못지않게 권력과 토지에 대한 욕망이 실현됐다는 점을 보여 준다.

또 노블레스 오블리주 자체의 목적처럼 양반 대지주로서의 지위를 공고하게 하려는 가장 안정적인 방법으로서 ‘덕부의 실천’을 바라볼 수 있다.

이는 비단 현재의 관점에서만의 평가가 아니라 선조와 효종 때의 녹우당의 토지에 대한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한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1715년 해남윤씨가 패지’와 ‘1850년 이병관 수표’ 두 문서는 내용으로만 보면 적선 행위로서의 증거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살피면서 토지에 대한 욕망의 실현이 잘 드러난다.
전남 해남군에 있는 해남윤씨 녹우당 © News1
전남 해남군에 있는 해남윤씨 녹우당 © News1

◇외모가 경쟁력이고, 집안이 배경이다.

‘신해년 도임일기’(辛亥年到任日記)라는 문서를 보면 정조의 초대장을 받고 해남에서 수원으로 올라온 윤선도 후손이 1791년 1월16일 밤에 정조를 만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내용 중 이채로운 점은 정조가 “잘생긴 사람이 벼슬에 오른다면 조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정조는 국왕의 위신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외모에 대해 많이 언급하며 외모 지상주의자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

실제 다산 정약용도 ‘외모에 대하여’(相論)에서 부모조차 총명하게 생긴 자식에게 유독 기대를 걸고, 잘생긴 사람은 벼슬길에 나아갈 때도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며, 출사 후엔 번듯한 생김새 덕분에 임금의 신임과 총애를 한몸에 받는다는 ‘외모 중시 풍조’를 질타했다.

이밖에도 문집, 족보 등을 보면 정조와 순조 때 ‘지’(持)자 항렬 대부분이 이름을 바꾸는데 윤지충·윤지헌 형제 때문이다.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으로 해남윤씨 가문은 두 사람의 죄상을 공개적으로 성토하면서 “역적들과 더불어 하루도 같은 항렬로서 세상에 설 수 없다”며 개명을 요청했다.

◇토지매매문서 속 사람들의 사연을 읽는다.

해남윤씨 녹우당 종가에는 1000점에 이르는 많은 땅문서가 전한다. 그중 ‘1697년의 토지매매명문’은 ‘자화상’으로 널리 알려진 공제 윤두서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종 일복을 시켜서 토지매매를 대항하게 한 내용이다.

윤두서는 아버지를 대신해 30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해남윤씨 종가의 막중한 책무를 맡고 많은 고민에 휩싸였다. 그는 집안의 여러 종 중 대대로 집안일을 맡아 처리하면서 검증된 일복이를 주목했다.

윤두서는 종가 인근의 논 2마지기를 사들이면서 일복이를 수노로 임명했는데, 일복은 40대부터 해남윤씨 종가의 종손 3대에 걸쳐 충성을 다한 공을 비로소 인정받은 것이었다.

이 문서를 통해 매매 과정에서 토지를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팽팽한 입장이 어떻게 조율돼 거래로 성사되었는지는 물론 노비 일복의 가족 현황까지도 살펴볼 수 있다.

(서울=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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