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겨누는 정부, 숨죽인 부동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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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다음 주 초 대출규제 등 발표
신규 분양보증 전면 중단… 盧정부 실패 재연 우려도


“부동산 문제를 잘 인식하고 시장 상황을 면밀히 보고 있다.”(4일 장하성 대통령정책실장)

“부동산 투기는 좌시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재천명한다.”(13일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이달 들어 부동산 시장을 향한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경고 메시지가 연일 쏟아졌다. 문재인 정부 초기부터 서울 강남 등의 집값이 급등하면서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서울 강남 재건축 아파트 값은 한 달 새 1억 원씩 뛰었고 수도권 분양 아파트 본보기집마다 사람들이 몰려 입장까지 두세 시간을 기다리는 장면이 연출됐다.

결국 정부는 13일부터 대대적인 현장 단속을 시작한 데 이어 다음 주초 첫 부동산 패키지 대책을 내놓기로 했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등 대출 규제를 선별적으로 조이고 청약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 등이 담길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맞춰 주택도시보증공사(HUG)는 16일부터 신규 아파트에 대한 분양보증 발급을 전면 중단했다. 정부 규제를 피해간 분양 아파트에 청약자가 몰리는 걸 방지하려는 조치다.

정부의 고강도 압박에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부동산 시장은 거래가 눈에 띄게 줄고 며칠 새 호가(부르는 값)를 수천만 원 낮춘 급매물이 나오는 등 숨을 죽인 모습이다.

부동산정보업체 부동산114에 따르면 이번 주 서울 아파트 값은 0.32% 올라 지난주(0.45%)에 비해 상승세가 한풀 꺾였다. 특히 과열 진원지로 꼽히는 재건축 아파트는 상승률(0.32%)이 전주(0.71%)의 절반 이하로 둔화됐다.

정부는 부동산 패키지 대책에도 가격이 안정되지 않으면 8월 내놓을 가계부채 종합대책에서 규제 강도를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를 두고 노무현 정부 때처럼 집값을 잡기 위한 정부와 시장 간의 ‘숨바꼭질’이 시작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각에서는 새 정부도 임기 내내 ‘부동산과의 전쟁’을 치렀던 노무현 정부처럼 부동산에 발목이 잡히는 것 아니냐는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다.

▼盧정부땐 전국서 집값 폭등… 지금은 일부지역만 과열▼

文정부 부동산 대책, 盧정부 초기와 비교해보니


“집값과 전셋값은 반드시 안정시키겠습니다. 이 문제만큼은 대통령인 제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4월 취임 이후 첫 국회 연설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서울 강남 재건축 단지를 중심으로 집값이 들썩이던 때였다. 당시 서울 아파트 매매가(3.3m² 기준)는 처음으로 1000만 원을 넘어섰다.

노무현 정부는 그해 ‘5·23 주택가격 안정대책’을 시작으로 임기 5년간 크고 작은 부동산대책을 30여 차례나 쏟아냈다. 하지만 출범 첫해인 2003년 전국 아파트 값은 13.36% 급등했고, 임기 5년 동안 서울 아파트 값은 57%나 치솟았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집값 움직임이 심상찮다. 새 정부 출범 한 달간 서울 아파트 값은 1.49% 뛰었다. 노무현 정부 한 달간 서울 아파트 매매가 상승률은 0.64%였다. 첫 달의 서울 집값만 비교하면 오히려 이번 정부의 상승세가 더 높은 셈이다.

○ 부양에서 규제로 ‘U턴’

현재의 부동산 과열 조짐과 ‘규제 카드’를 서둘러 꺼내든 새 정부의 모습은 노무현 정부 때와 여러모로 닮아 있다.

우선 집값 상승세를 이끈 시장 여건이 비슷하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시계획학)는 “두 정부 모두 부동산으로 경기 부양에 나섰던 이전 정부의 영향이 크다”며 “지난 정부가 시장에 불어넣은 온기가 남아 있는 데다 새 정부 출범에 따른 기대가 맞물렸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부동산 규제를 대대적으로 풀어 집값 띄우기에 나섰다. 노 대통령은 이를 두고 국회 연설에서 “2001년 ‘국민의 정부’가 불경기를 극복하기 위해 부동산 경기를 부추기고 가계대출의 무분별한 확대를 방치했다”고 언급했다. 박근혜 정부도 2014년 대출 규제인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등을 대폭 완화하며 부동산 부양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저금리로 시중에 풀린 풍부한 유동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려드는 것도 닮았다. 노무현 정부 당시 미국 금리가 낮아지면서 국내 대출금리는 2006년까지 꾸준히 하락세를 그렸다. 당시 현대경제연구원은 보고서에서 “외환위기 이후 증시를 이탈한 개인투자자들이 저금리 기조 속에 마땅한 투자수단을 찾지 못해 아파트에 투자하고 있다”고 했다. 2003년 시중통화량(M2)은 약 890조 원 수준. 지금은 초저금리가 이어지면서 시중통화량이 사상 최대인 2450조 원을 넘어섰다.

함영진 부동산114 리서치센터장은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과 지난해를 비교하면 연간 100만 건씩 주택 거래가 활발히 이뤄지는 게 비슷하다”며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투자’가 많은 것도 공통점”이라고 설명했다.

○ 전국 급등 vs 국지적 과열 큰 차이

과열의 겉모습은 닮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차이점이 더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주택정책실장은 “노무현 정부 당시는 외환위기 때 꺼진 시장이 회복을 거쳐 전반적으로 급등 양상을 보였지만, 지금은 이명박 정부 이후 꾸준히 안정세를 이어오다가 작년 말과 올해 초 침체됐던 시장이 반등한 모습”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노무현 정부 때는 서울 강남을 비롯해 전국 집값이 일제히 뛰었다. 하지만 현재는 서울과 부산, 세종 등 일부 지역만 과열 양상을 보이며 지역별 온도차가 뚜렷하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한 달간 지역별 집값 상승률을 보면 서울 세종 등은 1% 이상 올랐지만 울산(―0.08%) 경북(―0.15%) 충남(―0.11%)처럼 하락한 곳도 많다.

이는 주택 공급 여건과 맞물려 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 전국 주택보급률은 98.3%에 그쳤다. 서울은 93.7%로 전국에서 가장 낮았다. 하지만 2015년 현재 전국 주택 보급률은 102.3%로 올랐다. 여전히 전국 최저 수준인 서울(96.0%)과 경기(98.7%)를 제외하고 모든 시도가 100%를 넘는다. 박원갑 KB국민은행 WM스타자문단 수석전문위원은 “노무현 정부 때는 절대적으로 주택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경기 상승 국면이 되자 사람들이 집을 사려고 몰려들었다”며 “지금은 인프라가 부족한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과열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초저금리 기조도 막을 내리는 분위기다. 미국이 올 들어 2차례 기준금리를 올린 데 이어 4조5000억 달러 규모의 보유 자산을 연내에 거둬들이겠다는 방침을 밝히며 돈줄 죄기를 본격화했다. 이미 국내 대출금리는 꿈틀거리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하면 현 상황이 노무현 정부 때만큼 심각한 건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현석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노무현 정부는 후반부로 갈수록 집값이 올랐지만 새 정부는 초기가 꼭짓점 분위기”라며 “다만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서울은 안심할 수준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 수요 억제만으론 한계…공급 신호 줘야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대책은 투기 세력을 뿌리 뽑겠다는 명분 아래 공급 확대보다는 수요 억제에 치중했다.

“헌법만큼 바꾸기 힘든 부동산 제도”(김병준 전 대통령정책실장)라고 자평했던 ‘8·31대책’ 등 30여 차례 쏟아진 대책은 △분양권 전매제한, 투기과열지구 등 거래 규제 △종합부동산세 등 세제 강화 △LTV, DTI 등 대출 규제 강화 등으로 수요 차단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면서 과열의 진원지인 강남 재건축을 잡기 위해 초과이익환수제, 중소형주택 건설 의무화 등 재건축 규제를 도입했다. 서울에서 새 아파트를 지을 수단이 사실상 재건축·재개발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택 공급을 조여 집값 상승의 빌미를 준 셈이다.

새 정부도 다음 주 청약, 대출 규제 같은 수요 억제책을 중심으로 첫 대책을 내놓는다. 또 내년부터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부활이 예고돼 있다. 이 교수는 “서울에도 주택이 공급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게 중요하다. 공급 억제 시그널만 있으니 시장이 불안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노무현 정부는 지역균형발전을 목표로 혁신도시, 기업도시, 세종시 등 대규모 개발사업을 진행했다. 임기 5년간 이런 개발사업에 지급된 103조 원 이상의 토지보상금이 서울 강남 지역 등으로 유입돼 집값을 끌어올렸다.

문재인 정부는 기존 도심 기능을 되살리는 ‘도시재생 뉴딜 사업’에 매년 10조 원씩 총 50조 원을 투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함 센터장은 “뉴딜 사업에 풀리는 막대한 돈이 일부 지역으로 흘러들어가 풍선효과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새 정부는 부동산대책에 이어 8월 가계부채 종합대책도 마련하고 있다. 1360조 원에 육박한 가계부채 증가세를 잡으려면 대출 조이기가 불가피하지만 부동산 규제 등과 겹쳐 어렵게 살아난 경기에 다시 찬물을 끼얹을까 봐 고심하는 모습이다.

두성규 건설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아직은 부동산 시장과의 전쟁을 선포할 때가 아니다”라며 “현 시점에선 국지적 과열을 해소할 최적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임수 imsoo@donga.com·박성민 기자·강성휘 기자
#부동산#문재인 정부#분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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