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라와 의리 집착하다 제 발등 찍은 호세프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브라질 대통령 탄핵안 하원 통과]
비리 덮어주려 ‘면책 꼼수’… 역풍 맞아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69)은 뚝심의 정치인이다.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군부 독재 시절 반(反)정부 게릴라 활동에 뛰어들었다가 3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다. 출옥한 뒤 만학도로 경제학 공부를 시작해 통화 이론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이런 뚝심은 인간관계에도 적용된다. 2001년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전 대통령(71)이 창당한 노동자당(PT)에 입당한 뒤 15년간 룰라의 솔메이트 자리를 지켜 왔다.

2003년 룰라가 대통령에 취임하자 에너지부 장관(2003∼2005년)과 국무총리 격인 수석장관(2005∼2010년)을 맡으며 브라질을 신흥 경제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룰라의 기적’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브라질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는 영광도 누렸다. 2014년 재선에 성공하면서 룰라-호세프 왕조는 16년간 황금시대를 이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2015년 브라질 최대 국영 석유 기업인 페트로브라스 비리 스캔들이 터지면서 그 왕조는 기울기 시작했다. 룰라 정부 시절 유전 개발 독점권을 부여받은 페트로브라스가 납품 업체와 이중 계약으로 뇌물을 챙기고 이를 정관계 로비 자금으로 뿌렸음이 폭로됐다. 2004∼2012년 조성한 비자금 규모가 100억 헤알(약 3조2550억 원)이며 이 중 상당 부분은 집권 여당인 PT와 룰라 전 대통령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호세프 대통령도 2003∼2005년 에너지장관으로 페트로브라스 이사회 의장을 맡았다는 점에서 부패의 먹이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호세프 대통령은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성역 없는 수사가 아니라 룰라 전 대통령과의 의리를 택했다. 검찰의 수사망이 룰라 전 대통령을 향해 조여 오자 면책특권을 부여하기 위해 그를 수석장관에 기용하려 했다. 하지만 페트로브라스 스캔들 수사를 지휘하던 세르지우 모루 수사판사(44)가 호세프 대통령과 룰라 전 대통령의 비밀 통화 내용을 공개했다. 이어 연방대법원이 룰라 전 대통령의 수석장관 임명 유예 판결을 내렸다.

이를 전후해 브라질 주요 도시는 ‘13-171’이란 수인번호가 찍힌 죄수복 차림의 룰라 전 대통령과 ‘탄핵’이란 어깨띠를 두른 호세프 대통령의 대형 풍선을 앞세운 시위대에 점거됐다. ‘13’은 집권 노동자당의 투표 번호이고 ‘171’은 브라질 형법에서 금품 갈취 죄 조항 번호이자 ‘신뢰할 수 없는 자’를 뜻하는 브라질 속어다. 그리고 PT의 최대 연정 파트너였던 브라질민주운동당(PMDB)이 연정 파기를 선언하면서 호세프 대통령과 룰라 전 대통령은 사면초가에 빠지게 됐다. 호세프 대통령의 뚝심 정치가 전현직 대통령 모두의 무덤을 파는 자충수가 돼 버린 것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룰라#호세프#탄핵안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