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착순 대기표 아수라장… 화장실 북새통… “재난영화 보는 듯”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26일 03시 00분


[제주공항 운항 재개]
‘2박3일 공항노숙’ 악전고투 현장

“우유 주세요” 늘어선 줄 25일 제주공항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과자와 우유를 나누어 주고 있다. 항공기 운항이 재개된 이날 공항에 탑승객들이 몰리면서 편의점 등에서는 빵 과자 등 식료품이 동이 났다. 한라일보 제공
“우유 주세요” 늘어선 줄 25일 제주공항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과자와 우유를 나누어 주고 있다. 항공기 운항이 재개된 이날 공항에 탑승객들이 몰리면서 편의점 등에서는 빵 과자 등 식료품이 동이 났다. 한라일보 제공
23일부터 사흘간 아시아를 대표한다는 관광도시 제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일부 항공사의 허술한 대응 시스템과 비뚤어진 상혼이 더해지면서 제주국제공항은 아수라장이 됐다. 졸지에 ‘노숙인’ 신세가 된 김문수 씨(28)는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공항인데 외국인 관광객 보기가 창피했다”고 말했다.

○ 탑승객 대기 시스템 엉망

제주공항 운영이 25일 재개됐지만 일부 승객들은 여전히 극도의 혼란 속에 공항에서 밤을 지새웠다. 저비용 항공사들의 묻지 마 식 대기 시스템 탓이다. 가장 먼저 결항된 항공편 탑승객 순으로 임시편 여객기 좌석이 자동 배정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선착순으로 대기표를 지급했기 때문이다. 수천 명의 승객이 노숙을 선택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날 오후 제주에서 이륙한 첫 여객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한 전모 씨(40·여)는 “전쟁터에서 겨우 탈출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 저비용 항공사를 이용한 전 씨는 24일 항공사 카운터 앞에서 꼬박 17시간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대기번호를 받았다. 그런데 25일 오전 6시 30분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전날 제공된 대기번호가 모두 무효가 돼 또다시 줄을 서야 한 것이다.

항공사 직원이 대기번호를 알려주는 과정에서 승객의 응답이 없으면 그 다음 순번으로 넘어가는 일도 잦아 곳곳에서 고성이 터져 나오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백기동 씨(25)는 “수백 명이 여행가방을 실은 카트를 밀고 줄을 서면서 공항 내 대합실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통신이 두절되는 일도 있어 모두가 극도로 예민해졌다”고 전했다. 김은호 씨(30·여)는 “대기 순서대로 기다리다간 이번 주말에야 제주를 빠져나갈 수 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고 말했다. 반면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 카운터는 비교적 한산했다. 결항 승객들에게 문자로 대기번호를 안내하고 탑승 시 3시간 전에 문자로 공지했기 때문이다.

○ 음식·전기·숙소 찾기 ‘전쟁’

폐쇄 사흘째였던 25일 오전 공항 화장실 앞에는 긴 줄이 섰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세수와 양치질을 하려는 사람들의 행렬이다. 냄새나는 화장실 입구 바로 앞까지 자리를 깔고 누워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수백 명이 사용한 세면대에는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간밤에 사람들이 배달 주문한 찜닭과 피자, 치킨 등 음식물쓰레기와 박스들이 화장실에 나뒹굴었다.

윤모 씨(30)는 “기본적인 양치질과 세수만 하는 데도 시간이 한참 걸렸다”며 “며칠째 머리를 감지 못해 냄새 때문에 신경이 너무 쓰인다”고 말했다. 윤 씨는 “어젯밤 비상구 계단 쪽에서 노숙했는데 바람 때문에 새벽에 너무 추웠다”며 “제공받은 담요가 있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급기야 제주도는 이날 공항 근처 사우나를 오가는 무료 셔틀버스 서비스까지 제공했다.

휴대전화 충전 전쟁도 심각했다.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뉴스 속보를 확인하고 가족 지인들과 수시로 통화하느라 배터리가 금세 바닥났기 때문이다. 공항 곳곳에서 콘센트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정유림 씨(30·여)는 “화장실에 있는 비데의 전원을 뽑아 변기에 앉은 채 충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전했다. 공항 내는 물론이고 근처 편의점에도 진열대가 텅텅 비었다. 혼자 여행을 온 취업준비생 진은혜 씨(27·여)는 “편의점에 즉석밥 같은 인스턴트 음식이 한 개도 없었다”고 말했다.

노숙이 엄두가 나지 않아 겨우 공항을 벗어났던 사람들은 숙소를 구하느라 진땀을 뺐다. 이기주 씨(38)는 “메뚜기처럼 숙박 가능한 업소를 찾아서 헤맸다”며 “소셜커머스에서 1박 단위로 방을 구하면서 겨우 잠을 잤다”고 한숨을 쉬었다. 고자영 씨(26·여)는 “인터넷에도 없는 낡은 모텔을 수배해 겨우 방을 얻었다. 모텔과 게스트하우스 등의 빈방을 찾아다니며 하루씩 지냈다”고 언급했다.

○ 바가지 상혼 ‘눈살’

‘재난급’ 상황 속에서 어김없이 바가지 상혼도 극성을 부렸다. 이정원 씨(31)는 “공항에서 노숙한 사람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세 줄에 1만 원을 내고 얇은 김밥을 사먹었다”고 전했다. 이성희 씨(47)는 “택시 기사에게 1시간 거리인 협재까지 가겠다고 하니 10만 원을 부르더라. 공항 밖까지만 나가는 데도 5만 원을 불렀다”고 말했다. 김모 씨(29)는 “렌터카 계약 기간을 연장하려고 하니 가격이 두 배였다. 무료였던 스노체인도 2만 원의 대여료를 받았다”고 말했다.

전주영 aimhigh@donga.com / 유원모 기자
#제주공항#재난#체류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