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6년여 동안 끌어온 ‘한일청구권협정’의 위헌 여부를 아예 판단하지 않은 건 위헌이든 합헌이든 어느 한쪽으로 결론 낼 경우 거센 후폭풍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분석된다. 위헌 결정으로 재협정을 추진한다면 일본의 반발이 불 보듯 뻔하고, 합헌 결정을 하면 2012년 대법원이 이 협정에 대해 “정부 간 청구권은 해결됐다 하더라도 우리 국민 개인의 청구권까지 제한한 건 아니다”라고 한 판결 취지와 상충돼 또 다른 논란이 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헌재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의 딸 이윤재 씨(72)가 “한일협정으로 인해 아버지가 일제에 강제동원돼 노역한 대가를 일본으로부터 받을 수 없게 돼 재산권이 침해됐다”며 낸 헌법소원을 23일 만장일치로 각하했다. 심판을 할 수 있는 요건인 ‘재판의 전제성’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근거였다. 헌재는 △구체적인 사건이 있고 △위헌 문제가 되는 법률이 해당 사건 재판에 적용되고 △법률의 위헌성에 따라 재판 결과가 달라져야 안건으로 올려 위헌인지 심판할 수 있는데, 이 씨의 사건은 한일협정의 위헌 여부와 관계가 없어 아예 위헌 여부를 판단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이 씨의 아버지는 1942년 10월 일제에 의해 강제징용돼 해군 군무원으로 노역하다 사망하면서 미수금(임금 등) 5828엔을 받지 못했다. 한국 정부는 2007년 제정한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지원법에 따라 미수금 1엔당 2000원으로 환산해 1165만6000원을 유족에게 지급하기로 했다. 이 씨는 액수 산정을 다시 해달라며 소송을 냈고, 미수금을 ‘1엔=2000원’으로 규정한 지원법과 더불어 청구권을 제한한 한일협정 등이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헌재는 이 씨 사건이 미수금 산정방식을 규정한 지원법을 두고 다투는 사안이라 한일협정의 위헌 여부가 사건 판결에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번 결정이 “한일협정이 합헌”이라고 결정한 게 아닌 만큼 논란이 종식된 것은 아니다. 헌재 관계자는 “향후 한일협정이 재판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사건 등 재판의 전제성을 갖춘 사건이 헌법소원으로 접수되면 언제든 정식 안건으로 올려 심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헌법소원 대리인 최봉태 변호사는 선고 직후 “헌재가 위로금을 ‘시혜적 성격’이라고 해석한 건 피해 보상 책임은 일본 정부에 있다는 의미”라며 일본의 책임 있는 자세를 촉구했다.
이번 결정으로 외교부는 12차 한일 국장급 위안부 협의, 박근혜 대통령의 첫 일본 방문 등 현안에 집중할 동력을 확보했다. 가와무라 야스히사(川村泰久) 일본 외무성 대변인은 이날 협정에 대한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며 “어려운 문제들이 있지만 한일관계 진전을 위해 서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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