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임진강 아이스하키 트로피’ 납치사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4일 03시 00분


코멘트

캐나다의 6·25전쟁 참전 상징물

1952년 임진강서 사기진작 경기
2000년부터 한국서 매년 기념대회
지난 4월 주한 미군이 ‘슬쩍’… 美로
제작자 눈물 호소… 다시 돌아와


저는 올해 열다섯 살입니다. 은색 몸체에 키는 50cm 정도. 저는 6·25전쟁 덕분에 태어났습니다. 6·25전쟁 참전국인 캐나다가 파병 군인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1952년 겨울 얼어붙은 임진강에서 아이스하키 경기를 벌였습니다. 주한 캐나다인들은 이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2000년부터 한국에서 ‘임진 클래식 아이스하키’ 대회를 열었고, 저는 그 대회의 우승 트로피랍니다.

저는 4월경 주한 미8군 군인들에게 납치돼 미국 알래스카까지 끌려갔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15년 전 저를 만든 앤드루 몬티스 홍익대 영어영문학과 교수(45)는 아이스하키 대회를 후원하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한 술집에 저를 전시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4월 4일 늦은 오후 가게가 북적이는 틈을 타 미군 W 하사(31)가 저를 훔쳐갔습니다.

제가 없어진 걸 안 몬티스 교수는 서울 용산경찰서에 신고했습니다. 경찰은 인근 폐쇄회로(CC)TV 30여 대를 뒤져 용의자를 쫓았고, 미8군 소속으로 추정되는 남성들이 인근 술집에서 저를 들고 춤을 추는 걸 발견했습니다. 경찰은 CCTV의 인상착의를 바탕으로 주한미군 헌병대에 용의자를 찾아달라고 요청했고, 4월 중순경 경기 의정부에서 근무 중인 W 하사를 찾아냈습니다. 경찰에 출석한 W 하사는 “잘 모른다. 트로피 갖고 놀긴 했지만 가져가지는 않았다”며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몬티스 교수는 답답한 마음에 주한 캐나다대사관까지 찾아가 대책을 의논했습니다. 저는 사실 주한 캐나다인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한 존재입니다. 캐나다의 6·25전쟁 참전을 상징하기에, 1년에 한 번씩 캐나다 현지에서 열리는 한국전 기념 아이스하키 대회에서도 저를 우승 트로피로 씁니다. 1952년 6·25전쟁에 파병됐던 영웅들과도 숱한 기념사진을 찍었죠. 그걸 미군이 가져갔으니, 몬티스 교수는 미8군 사령관에게 공식 항의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죠.

이 사실을 들은 경찰은 W 하사를 재소환하고 그 자리에 몬티스 교수를 동석시키기로 했습니다. W 하사를 만난 몬티스 교수는 “제발 트로피를 돌려달라”며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이 말에 마음이 흔들린 W 하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미국 알래스카 소속 B 하사(31)에게 연락합니다. B 하사는 한국에서 훈련을 마친 뒤 원래 소속부대인 미국 알래스카 기지로 돌아가면서 저를 데려간 공범입니다. 연락을 받은 B 하사는 항공우편을 통해 익명으로 저를 경찰서로 보냈는데, W 하사의 SNS를 추적하던 경찰에 결국 신원이 발각됐죠.

16일 저를 만난 몬티스 교수는 입을 맞추며 “감사합니다”를 연발했습니다. 비록 양 손잡이와 역대 우승팀 이름을 써 놓은 밑단 2칸이 파손됐지만요. W 하사는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절도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불구속 송치됐습니다.

이건혁 기자 gu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