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식당 착한 이야기]경기 여주 나물식당 ‘걸구쟁이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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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싹 뱀도랏, 이맘때 얼마나 향기로운지…

걸구쟁이네 부부는 늘 행복히다. 마당에 장독대를 갖춰놓고 좋은 재료로 장을 담근다. 자연이 숨쉬는 음식의 원천 이다. 여주=신원건 기자 lapyta@donga.com
걸구쟁이네 부부는 늘 행복히다. 마당에 장독대를 갖춰놓고 좋은 재료로 장을 담근다. 자연이 숨쉬는 음식의 원천 이다. 여주=신원건 기자 lapyta@donga.com
경기 여주군에 있는 나물식당 ‘걸구쟁이네’는 1년 6개월 전 이호리에서 5분 거리의 간매리로 이사했다. 사정을 모르는 손님들은 확장 이전인 줄 알았지만 실상은 달랐다. 2011년 추석 연휴, 조립식 콘크리트에 흙을 덮어 지은 이전 가게는 누전으로 전소(全燒)됐다.

“수저 하나 못 건지고 나왔다”는 47세 동갑내기 부부 윤보연 안서연 씨는 처음에는 허탈해서 웃었고, 다음엔 둘 다 멀쩡히 살아있어 감사한 마음에 웃었다고 했다. 10일 만난 부부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또 한번 웃었다.

“손님들이 그랬어요. 화재를 겪은 사람들 같지 않다고. 이 건물도 보증금 3000만 원 빌려서 왔는걸요. 하하하. 오랫동안 정직하게 장사한 덕에 설비를 외상으로 살 수 있었어요. 그렇게 진 빚은 ‘착한식당’ 소개되고 난 후 다 갚았어요.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겠어요.”(부인 안 씨)

걸구쟁이네는 지난해 4월 채널A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에서 착한식당 5호점으로 선정됐다. 가게 이름은 안 씨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 이름(경기 여주군 강촌면)에서 따왔다. 하지만 처음부터 걸구쟁이네는 아니었다. 1995년 처음 연 가게 이름은 그냥 ‘식당’이었다. 메뉴도 나물이 아닌 떡볶이였다.

당시 29세이던 젊은 부부가 갑자기 서울에서 낙향해 산 중턱에 분식집을 차린 데는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았다. 지적인 외모의 남편 윤 씨에게 산골에서 나물 캐는 인상은 아니라고 하자 “실은 고향이 서울 종로구 혜화동”이라며 허허 웃는다.

얘기를 들어보니 빚 1억 원 때문이었다. 가방회사 카드회사 보험회사 등을 전전하다 중고차 소개업에 손을 댔던 윤 씨가 진 빚이었다. 직장으로 빚 독촉 전화가 하루에 수십 통씩 걸려왔다. 윤씨는 사업을 접었고 불교 그림을 파는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던 안 씨도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세 살배기 딸을 업고 부부는 안 씨의 고향인 여주로 향했다. 그때 부부의 전 재산은 윤 씨의 큰형에게 빌린 200만 원. 윤 씨는 ‘식당’이라고 적힌 가게에서 밥도 먹고 장사도 하고 잠도 잤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불을 덮고 누우면 입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곳”이었다고 회상했다. 잃은 게 많았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힘든 시간을 함께한 부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를 얻었다. 하루도 떨어진 적 없는 부부는 서로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부부이자 직장 동료가 됐다.

그냥 ‘식당’이던 가게에 어엿한 이름이 생기고 자리가 잡힌 건 떡볶이를 접고 나물을 팔면서부터다. 안 씨는 “어릴 적 나물을 캐서 팔던 어머니 덕분에 집은 항상 나물로 그득했다. 나물 종류와 특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는 자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지천에 널린 나물을 캐는 데 돈이 들지 않았다. 재료값이 덜 드니 떡볶이보다 이문이 많이 남았다. 어느새 나물밥으로 메뉴가 바뀐 식당은 입소문을 타고 손님이 모여들었다. 동시에 빚도 조금씩 줄었다.

“제철 나물은 나오는 순서대로 먹으면 좋아요. 봄이 되면 가장 먼저 나는 냉이를 먹어보세요. 미나리싹, 뱀도랏(하얀색 작은 꽃을 피우는 미나리와 비슷한 산형과 나물. ‘사상자·蛇床子’라고도 불린다)은 이맘때 얼마나 향기로운지…. 망초대 명아주 뚜깔나물도 좋고요, 높은 산에서 나는 지장나물 검은오리나물은 정말 맛있어요.”

이날 식당을 방문한 기자가 나물을 잘 모른다고 하자 안 씨의 친절하고 꼼꼼한 강의가 시작됐다. 손님 사이를 돌아다니며 나물 종류를 설명하는 일은 나물을 다듬는 것만큼 안 씨의 중요한 업무가 됐다. 평일이나 주말 식사 시간을 피한 오후 3∼4시에 가게를 찾아가면 인심 좋게 생긴 주인 부부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수 있다. 이날도 식전에 대접받은 산야초차를 비우기 무섭게 윤 씨가 부지런히 ‘리필’해 주었다.

나물정식을 시키니 돌솥에 담긴 곤드레밥과 도토리수제비를 비롯해 20여 가지 반찬과 샐러드가 줄줄이 나왔다.

걸구쟁이네는 사찰음식처럼 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서역에서 나는 식물) 등 오신채(五辛菜·불교에서 금하는 다섯 가지 음식)와 고기를 재료로 쓰지 않는다. 조미료는 물론이고 설탕과 물엿도 쓰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 대신 효소로 여러 맛을 낸다. 몇 년 전부터는 마당에 장독대를 갖춰놓고 물엿을 한 방울도 넣지 않은 고추장을 담그고 있다. 소금은 짠맛을 최소화하기 위해 3년이 지난 것을 쓴다.

부부가 직접 캐는 나물도 있지만 대부분은 전국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물할매’로부터 공수해온다. 이들은 재배하지 않고 직접 캐기 때문에 희귀한 나물을 얻을 수 있다. 강원 진부, 정선, 경남 함양 등지를 돌아다니던 부부는 나물을 직접 캐러 다니는 나물할매들과 거래를 터왔다. 좋은 나물이 들어왔다고 연락이 오면 부부가 택배로 신속하게 주문하는 식이다.

지금도 부부는 매달 강원 횡성의 5일장을 들러 단골 나물할매에게 귀한 나물을 사온다. 신혼여행 이후 여행을 가본 적 없는 부부는 횡성장 구경이 출장이자 여행이다. 나물을 캐기 힘든 겨울에는 봄철 캐놓은 나물을 삶아서 냉동하거나 건조해 보관한다. 대공이 많은 나물은 삶으면 쪼그라들기 때문에 염장(鹽藏)하는 게 원칙. “독초 빼고는 온갖 나물을 다 먹어봤다”는 안 씨가 17년간 연구하며 터득한 걸구쟁이네의 비법이다.

어릴 적부터 유달리 ‘나물 욕심’이 많았다는 안 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맨손으로 나물을 캐고 다듬고 씻는다. 어떤 나물은 모래가 많아 50번 씻을 때도 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손가락 관절은 여자 손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굵어졌고 어깨 결림은 직업병처럼 만성화됐다. 남의 손을 빌리고 싶지만 나물을 씻는 것과 무치는 것은 이 가게에서 안주인의 고유영역이다. 안 씨는 “나만의 손 기운이 있다”는 논리를 폈다. 그 대신 바깥주인은 나물을 다듬고 설거지와 밥을 담당한다.

“식당에 온 후 건강이 좋아진 손님이 많아요. 요즘에는 임신부가 많이 찾기 시작했죠. 아무리 육체적으로 힘들다고 해도 나물에 대해서는 더욱 깐깐해질 수밖에 없어요. 일종의 책임감이랄까요.”(안 씨)

이날 안 씨는 ‘먹거리 X파일’의 이영돈 PD가 선물한 주황색 머릿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착한식당에 소개된 후 가게를 방문한 몇몇 손님이 나물반찬에서 머리카락이 나왔다는 항의성 글을 올렸고 이 PD는 직접 가게에 들러 머릿수건을 선물했다. 안 씨는 “바빠서 머릿수건 하는 걸 매번 잊어버리는데 이 프로그램이 깨우쳐줘서 고마웠다”며 “이걸 쓰면 왠지 모를 책임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부부는 얼마 전 지난해보다 두 배 많은 메주를 담갔다. 이것 또한 책임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혹시라도 반찬이 모자라면 가게를 찾는 손님을 되돌려 보낼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좀더 빨리 손님에게 식사를 제공하도록 부부는 주말 아르바이트생 7명을 고용했다.

“‘착한식당’에 소개되며 단골손님의 반응은 갈렸어요. 손님이 많아져서 가게가 복잡해졌다는 반응과 가게가 북적거리니 보기 좋다는 반응이었죠. 솔직히 우리 부부는 좋았어요. 17년째 연중무휴니 가게 문은 그냥 열어두면 되고, 부족한 나물은 나물할매에게 더 캐달라고 하면 되고, 나물 반찬은 더 많이 만들면 되니까요.”(윤 씨)

걸구쟁이네 나물밥상 가격은 1만3000원이다. 식당을 연 후 지난해 2월 처음으로 가격을 올렸다. 그전까지는 변함없이 1만 원이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좀 독특했다. 여느 업체들이 가격인상을 하며 ‘원재료 가격과 인건비 상승, 그로 인한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대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16년 동안 같은 가격을 받는 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고객들의 항의가 여러 번 있었어요. 그러다 단골손님인 신륵사 주지스님에게 한 소리 들었어요. 이제 제발 올리라고. 화재가 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안 올렸을 텐데.”

“밥값 올리는 게 손님들에게 너무 미안했다”는 부부는 가격을 인상하는 대신 손님이 추가로 주문하는 밥은 돈을 받지 않기로 했다. 이른바 공깃밥 무한제공이다.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는데도 안 씨는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일일이 알려줬다.

“추가 밥은 공짜니까 더 드실 분 언제든 얘기하세요.”

여주=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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