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칼럼]<손택균의 카덴차>‘말하는 건축가’: 누가 누구에게 왜,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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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23일 09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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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내내 찾고 잃고 고민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고 미워한 것. 그래도 어쨌든 건축이었다. 게으르고 아둔하고 물러터진 탓으로 한번 택한 길을 다 가지 못한 채 전혀 다른 길을 디디며 살아가고 있지만.

두 해 전 초겨울. 일민미술관에서 정기용 교수를 테마로 한 기획전이 열렸다. 스케치와 글, 소장품으로 빼곡한 전시물 사이에 정재은 감독이 스토리를 엮었다는 3분 길이의 애니메이션이 반복해서 플레이되고 있었다. 그 기억의 배경이 낯설고 허하고 쓸쓸했던 것은, 혼자만의 착각이려니.

한 해를 더 거슬러 올라간 햇살 포근했던 겨울날. 정 교수의 삼청동 작업실에 앉아 등허리로 받는 볕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헛소리 비슷한 어설픈 질문을 잇달아 드렸다. 차근차근 타이르듯 답을 풀어내 주셨던 그분이 얼핏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개봉 소식을 듣고 망설였다. 보아야 할지.
무엇을 쓸 수 있을지.
무엇이든, 써도 될지.
국화 밭에 파묻힌 듯했던 영정에 절하고 잠깐 멀거니 섰다가 종종걸음으로 도망쳐 나왔던 봄날 밤의 기억이, 반복해서 플레이됐다. 한 해 전인데 가장 먼 기억이다. 바람이 찼다.

사진 제공 두타연
사진 제공 두타연

‘건축’을 표제로 내건 영화 두 편이 나란히 극장에 걸려 있는, 묘한 풍경의 시기다.
프랑스 건축가가 설계한 지하건물 속 극장에서 숙제하듯 ‘말하는 건축가’를 보고 나온 날. 내친 김에 다른 영화도 야간 유료시사로 털어내듯 봐버렸다. 기차역을 괴물 같은 미로로 뒤엎어버린 백화점 속 극장에서.
두 번째 영화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고 싶지 않다. 굳이 꾸역꾸역 그것까지 보고 앉아있는 나 자신의 미련함이 상영시간 내내 원망스러웠다.

‘말하는 건축가’는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한 권의 단출한 노트로 읽혔다.
이 땅에 언제나 존재했지만 이 땅의 누구나에게 언제나 생경하게 여겨지는, 건축이라는 야릇한 외곽의 대상. 그것을 평생 업(業)으로 붙들고 살다 간 어떤 이의 이야기를 열심히 받아 적은, 노트.
‘건축에 대한 노트’는 당연히 아니며, 그렇다고 한 특정 건축가에 대해서만 폐쇄적으로 기록을 제한한 노트도 아니다. 이 땅 위 사람들이 건축을 대하고 소비하는 무도한 보편적 방식에 대해서, 뷰파인더 뒤의 누군가가 조금씩 깨쳐가며 써낸 노트 같았다.

정 교수는 ‘좋은 건축가’였을까. 몇몇 건축가와 비평가가 등장해 각자의 의견을 들려준다. 평가라기보다는 인연의 소회에 가까운 말도 있다. 당연히, 또 다행스럽게, 의견의 향방은 제각각이다.
도망자이며 중도탈락자인 나는 거기에 감히 어떤 말도 덧댈 수 없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정 교수가 건축을 필생의 업으로 삼았던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보탬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 자신이 땀 흘려 일한 덕에 누군가 편안해하는 것을 보며 행복해 하는 사람. 그런 이는 아마 ‘좋은 사람’의 테두리 안에 당연히 들어갈 거다.
그런 마음씀씀이는 건축에만 한정될 리 없다. 인터뷰 내내, 마감에 쫓긴 어설프고 무지한 질문에 고민 다한 배려를 풍성히 얹은 답이 돌아왔다. 묵직한 인터뷰이가 겸허하고 솔직한 답을 안겨줄 때 감당하기 어려워지는 것은 늘 나 자신의 무능함이다. 진땀 흘리며 주워 담듯 받아 적고 나온 길의 뿌듯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차를 달려 정읍 기적의 도서관에 닿았던 날. 지붕에 달팽이 조형을 얹은 외관의 첫인상은 많이 난감했다. 책 읽는 아이들 옆에 쪼그려 앉아 사진을 찍으며 두 시간쯤 보내고 나니, 그 난감함이 내 얄팍함 탓임을 알 수 있었다.
들어가 쓰는 이보다 구경하고 소유하는 이를 배려하는 공간에 익숙해진 채 굳어버린, 시각과 가치관의 얄팍함.
이 영화가 보는 이의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면 온전히 피사체의 인품 덕일 것이다. 쿠션 두툼하고, 고집 센 인품이다.

그런데 그걸로 좋은 걸까.

사진 제공 두타연
사진 제공 두타연

중반부. 지방도시 공공시설물 건축 작업에 얽힌 모멸과 비탄을 짚던 이야기의 초점이 묘하게 ‘동대문’으로 점프한다.
이 부분 이후에 대한 관객의 해석과 반응이 궁금했다. 여러 갈래로 벌어질 수 있을지.
감독이 전달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의 방향은 또렷하다.
그런데 그것이, 정 교수가 하고 싶어 했던 이야기의 흐름과 같을까. 또는, 동대문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정 교수는 적절한 투사체일까.
동대문 프로젝트 꼼뻬에 참여했던 건축가들과 그 과정을 지켜본 비평가들의 코멘트가 엮어진다.
이 부분에서 정 교수는 희미하다. 오래 전 관공서 프로젝트 작업 때 VCR에 담은 코멘트가 대체재처럼 삽입된다.
저래도 될까.
정답이 있는 공간이 있을 리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 정답이 ‘있었다’는 듯, 영화는 이야기한다. 비약이며 무리수다.
감독은 혹시, 좋은 피사체는 찾았으나 ‘영화’를 엮기 위한 스토리 덩어리를 얻지 못해 고민했던 것 아닐지.

동대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잘못됐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하디드 아주머니가 던져낸 주물럭 UFO 조형물은 구태의연하다. 그녀의 전작들에 비해 이미지가 섹시하지 않다. 이미지의 섹시함이 그 건축가가 쌓아 온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한 부분을 생각하면 그 결함은 치명적이다.
그러나 자하 하디드라는 건축가가 반드시 동대문 프로젝트에 불합리하기만 한 선택이었는지.
나는 그에 대해 답할 자격이 없다.
건물은 완공 전이다. 어쨌거나 이왕 지어지고 있다. 되도록 아무 탈 없이 본래 의도대로 튼튼하게 잘 지어져서, 많은 사람들이 쾌적하고 편리하고 재미나게 그 공간을 이용하기를, 나는 희망한다. 때늦은 비판 때문에 칙칙한 절망으로 그 커다란 공간이 태생부터 비틀리지 않길 기원한다.
감히, 정 교수 역시 그렇게 바라셨으리라, 버릇없이, 되짚어 기대한다.

누군가 시사회에서 질문 서두에 “고맙다”고 이야기했다는 전언을 들었다.
누가, 왜, 이 영화로 인해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동대문을 다룬 중반부는 버거운 사족으로 보였다.
너무 큰 모자. 품이 헐렁한 양복 윗도리.
그분의 생전 맵시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진 제공 두타연
사진 제공 두타연

작품 기획전 진행 과정과 임종을 그린 뒤 생전 한때 모습을 짤막하게 담은 영상을 보여주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머리와 말미. 거기서 중반부보다 더 넉넉한 이야기가 보였다.
초등학교 때 마루에 엎어져 읽은 동화책. 지은 지 수십 년 된 한옥을 찾아온 백발의 목수가 집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더니 필요한 부분을 보수해준 뒤 표표히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들어가 머물고 움직일 당사자들의 의견을 찾아 물어 들은 뒤 그것을 기초 삼아 공간을 구성하고, 다 지어진 뒤에는 부족함 없이 잘 쓰이고 있는지 슬며시 찾아와 살피는 건축가가, 동화 밖에 실재했으며, 실재한다는 것.
응당 할 일을 틈 없이 행하려는 과정에서 지금 이 땅의 건축하는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싸움에 대해, 짤막하게나마 엿보도록 해 준 것. 거기에 대해서 조금은 고맙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엔딩 크레딧이 오르기 시작하자마자 불이 켜지기 전에 극장을 도망쳐 나왔다.

그 암담한 울컥함이 그저 내 마음 좁음과 경험 없음 탓이길, 부끄럽게 소망한다.

명품 가방이나 구두를 쇼핑하듯 이름난 외국 건축가들의 자폐적 프로젝트를 뭉텅뭉텅 사재기해 이 땅 곳곳에 진열하는 창피스런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시장바닥에서 콩나물 사듯 설계비 깎아대 놓고 “내 아이디어가 이 집의 콘셉트가 됐다”느니, “실제 기본 설계는 다 내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라느니 떠벌리는, 건축주들의 무례한 흰소리가 조금이라도 잦아들길.
꽃밭을 꾸밀지 빙판을 깔지 슬로프를 세울지 해마다 철마다 고민해야 하는 서글픈 광장이, 다시는 출현하지 않길.
무력하게 기원한다.

외곽의 대상이 한 뼘쯤이라도 중심으로 다가들어, 조금이나마 다른 존중과 이해의 기대를 품을 수 있게 되기를.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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