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손택균의 카덴차>까닭 없음과 덧없음의 차이. ‘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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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6일 10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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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맥스? 글쎄. ‘파이터’는 권투선수 형제를 중심인물로 삼았지만 그들이 엮어내는 링 바깥의 이야기를 고갱이로 다뤘다. 사진 제공 도로시
클라이맥스? 글쎄. ‘파이터’는 권투선수 형제를 중심인물로 삼았지만 그들이 엮어내는 링 바깥의 이야기를 고갱이로 다뤘다. 사진 제공 도로시

권투는 얼핏, 단순한 스포츠다.
힘닿는 데까지 치고받다가 주먹 더 세고 맷집 더 좋은 쪽이 이기는 경기.
권투라는 소재를 통해서 영화가 관객에게 전할 수 있는 이야기도 네모꼴 링처럼 단순할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 선입견은 아마, 30여 년 동안 여섯 편이나 질기게 이어낸 '록키' 시리즈가 남긴 우직한 잔상 탓일 거다.
가깝게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조금 멀게는 '성난 황소'. 링사이드 바깥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 둘은 틀림없이 권투 영화다. 그리고 모두 '록키'보다 몇 수 높은 품질과 짜임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10일 개봉한 '파이터'의 초점 역시 링 밖에 있다.
브루스 웨인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낸 크리스천 베일이 소파에 혼자 헐렁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담은 첫 장면.
"동생 없이는 인터뷰 안 해요."
멋쩍은 표정을 하고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동생 미키(마크 윌버그)와 형 디키(베일) 두 사람이 영화의 주재료다.
디키는 왕년에 전설적 복서 슈거 레이 레너드와 대결해 한차례 다운을 뺏은 일을 일생의 자랑으로 삼아 살아가는 퇴물 복서다. 그런 형을 우상으로 바라보며 성장한 동생 미키 역시 권투선수가 되지만 전적 쌓기가 순탄치 않다. 마약에 곯아 폐인 일보직전이 된 형이 트레이너랍시고 오히려 연습과 투어경기를 자꾸 망치기 때문.

…이라는 것 정도까지가 이 영화의 기본 골조다.
눈여겨 다시 볼 단어는 '때문'이다.
미키의 선수경력이 자꾸 꼬이는 건 정말, 디키 때문일까.
영화는 중반쯤부터 끝까지 이 질문을 거듭 새기게 만든다.
'연기 정말 잘 한다'는 어설픈 판단을 들이밀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으면서 그냥 생짜 날건달로 변태(變態)한 모습을 보여주는 베일. 그의 징그럽게 집요한 대사와 표정 하나하나가 전반부의 떡밥이다.
이야기 포석을 대충 얽어낸 지점부터 하나하나 아프게 헤집어 살피는 것은, 복서 형제와 주변 가족들의 얽히고 꼬인 관계에 맺힌 균열과 봉합의 흉터들이다.

누구나 싸운다. 살기 위해. 왜 그렇게 쉼 없이 처절하게 싸워야 하는지 분명한 까닭을 아는 이, 얼마나 될까. 까닭을 모른다 해서, 의미 없는 싸움일까. 사진 제공 도로시
누구나 싸운다. 살기 위해. 왜 그렇게 쉼 없이 처절하게 싸워야 하는지 분명한 까닭을 아는 이, 얼마나 될까. 까닭을 모른다 해서, 의미 없는 싸움일까. 사진 제공 도로시

미키의 프로복서 일은 '패밀리 비즈니스'다.
형 디키가 트레이너, 어머니 앨리스가 매니저, 무려 6명이나 되는 누이들은 고정 서포터.
든든할까.
미키의 승승장구를 응원하는 가족들의 진심이야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설령 그 간절한 바람의 한구석 응달에 자신에게 떨어질 떡고물을 가늠하는 은근한 계산이 숨어있다 하더라도, 그 자연스러운 사심(私心)은 나쁜 것이라 탓하기 어렵다. 사람 사는 게 뭐,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진심의 무게와 속내의 계산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적 도움이 미키의 전적에 미치는 실질적 영향이다.
가족은 무조건 내 편이다. 그러니까 가족이라고 한다, 고 한다.
그런데 그 응원이 내게, 도움이 되고 있는 걸까.
가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을 의심이다.

트레이너 형과 매니저 어머니. 권투선수인 둘째아들에게 이들은 완벽한 도우미 팀일까. 이들이 결국 주고받는 것은 그 흔한 토로다. “난 너에게 모든 걸 다 해줬어!”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답을 알면서 공연히 던져대는, 응어리의 돌팔매. 사진 제공 도로시
트레이너 형과 매니저 어머니. 권투선수인 둘째아들에게 이들은 완벽한 도우미 팀일까. 이들이 결국 주고받는 것은 그 흔한 토로다. “난 너에게 모든 걸 다 해줬어!”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답을 알면서 공연히 던져대는, 응어리의 돌팔매. 사진 제공 도로시

어머니와 형의 무리한 판단 '때문'에 라스베가스 게임에서 참패(했다고 생각)한 미키는 새 여자친구 샬린의 권유를 받아들여 새 트레이너와 매니저를 찾아간다.
마약 살 돈을 구하기 위해 경찰을 사칭하고 강도짓을 벌이던 형 디키는 결국 감방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수감된 덕에 마약을 끊고 갱생의 희망을 찾은 디키는 출소하자마자 미키의 훈련장부터 찾는다.
"금방 옷 갈아입고 나올게 동생아. 잠깐만 기다려."
미키가 머뭇머뭇, 그러나 똑똑히 말한다.
"형. 미안한데, 이제 내 일에서 좀 빠져 줘."

영화 '파이터'의 이야기가 특별해지는 건 여기부터다. 경력의 전환점을 만들 계기가 돼준 여자친구 샬린의 도움은, 가족들의 어설펐던 도움과 비교해서 또 얼마나 더 실질적이고 효과적일까.
'커리어에 보탬이 될 상대만 냉정하게 선별해 주겠다'고 한 새 매니저의 작업은 과연, 가족들의 허접했던 극성 뒷바라지보다 미키에게 더 도움이 될까.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면, 여자친구와 새 매니저와 트레이너는, 사욕만을 위해 미키를 대충 이용하려고 든, 가족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나쁜 사람들일까.

온전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가족. 잊었던 행복을 다시 느끼게 해준 새 연인은, 그 빈틈을 채울 대타가 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사진 제공 도로시
온전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가족. 잊었던 행복을 다시 느끼게 해준 새 연인은, 그 빈틈을 채울 대타가 될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사진 제공 도로시

완벽한 친구, 완벽한 가족, 완벽한 연인, 완벽한 매니저 같은 건, 없다.
중요한 경기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은 순간 미키를 구한 것은 형 디키가 건넸던 한 마디의 조언.
그러니 '디키만이 진정한 파트너'일까.
아니다.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가족인 것이 아니다.
그냥 가족인 거다.
내게 정말 큰 힘이 되기 때문에 연인인 것이 아니다.
그냥 사랑하는 거다.
매니저와 트레이너는 자신이 아는 최선의 이기는 방법을 선수에게 가르치려 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매니저와 트레이너의 마음에는 선수의 승리에 대한 바람만큼 그 성공에 힘입어 자신의 영달을 꾀하려는 사심이, 당연히 존재한다.
선수는 그냥 땀 흘리고, 그냥 링에 올라, 자신의 주먹을 휘두르는 거다.

'파이터'의 가족 이야기에서 유난히 크게 들리는 두 문장의 클리셰가 있다.
"나는 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어!"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니!"
어떤 판단도 없다. 그냥 들려주고 보여준다. 살아가고 사랑하고 가족을 만나고, 삶을 버티고 이겨내려 싸우는 데, 어디 똑 떨어지는 확실한 까닭 같은 것이 있던가.
이유가 없다고 해서, 무의미하던가. 그럴 리 없다. ★★★(다섯 개 만점)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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