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북/커버스토리]①윤석진 교수 “눈물 콧물 흘리다가도 자연스레 메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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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6일 11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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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양의 여자', 김지수 연기에 매료
● 눈물 콧물 흘리며 보다가도 메모는 꼭 챙겨
● '용두사미' 많아 6회는 봐야 '대박'여부 확실해져

'테돌이'란 별명은 텔레비전을 늘 곁에 끼고 산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다 큰 남자'가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 콧물 다 쏟다 또 돌연 배꼽을 잡는 통에 늘 슬며시 혼자 TV앞에 앉곤 한다. 도대체 이 사람, 정체가 뭘까. 백수? 드라마 '폐인'?

최근 드라마 평론집 \'TV드라마, 인생을 이야기하다\'를 펴낸 충남대 국문과 윤석진 교수. 사진=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최근 드라마 평론집 \'TV드라마, 인생을 이야기하다\'를 펴낸 충남대 국문과 윤석진 교수. 사진=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 울다가 웃으며 보는 드라마

그가 여느 드라마 마니아와 다른 점은 드라마에 몰입해 울고 웃다가도 손은 자동적으로 미리 준비된 펜과 메모지로 향한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드라마 평론가인 충남대 국문과 윤석진 교수(46)에게 드라마는 이처럼 생활이자, 일이자, 매일같이 만나는 연인 같은 존재다.

최근 그가 두 번째 드라마 비평집, 'TV드라마, 인생을 이야기하다(충남대 출판부)'를 펴냈다. '스타의 연인(SBS)' '카인과 아벨(SBS)' '결혼 못하는 남자(KBS2)',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MBC)' 등 최근 방영된 드라마 18편을 사랑과 연애, 결혼이라는 주제에 맞춰 비평한 책이다.

- 이번 책에 소개된 18편의 드라마 가운데 가장 인상 깊게 봤고, 심혈을 기울여 평론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태양의 여자(KBS2)'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저조한 시청률로 시작했지만 개성 넘치는 등장인물, 인간 내면 심리에 대한 진지한 문제 제기 등 탄탄한 기본기에 힘입어 방영이 끝날 무렵엔 동시간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작품이죠."

그는 이번 평론집을 통해 다룬 드라마들에서 가장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준 배우로도 '태양의 여자'에 출연한 김지수를 꼽았다. "한 번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해 내면이 황폐한 여자 신도영이 위기를 모면하고자 거짓만을 일삼다 무너지는 과정, 그리고 그 불안감을 섬세히 연기했다"는 평이다. 그는 "김지수의 연기력 덕분에 자칫 통속적으로 흐를 수 있었던 내용이 명작으로 승화됐다"고 평가했다.

- 평론가는 어떤 '자세'로 드라마를 보게 되나요. 일반 시청자들처럼 웃고 울기도 하는지.

"저는 감정을 완전 무장 해제 시킨 다음 드라마를 보는 편입니다. 웃기려고 하면 신나게 웃어주고, 울리려 하면 눈물 콧물 흘리며 보죠. 그러면서도 문제적 장면이나 탁월한 장면을 보게 되면 손은 어느새 텔레비전 앞에 놓여 있는 메모 노트를 챙길 수 밖에 없죠. 최근작 중에서는 '내조의 여왕(MBC)'을 가장 재밌게 봤는데 '토사구팽'을 '토사구땡'이라고 말하는 천지애의 무식함에 배꼽을 잡다가 먹고 살기 위해 여고시절 자기보다 아래에 있다 느꼈던 친구 양봉순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에선 함께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었어요. 이렇게 일반 시청자들처럼 감정에 충실하며 드라마를 보지만, 아무래도 캐릭터와 구조, 대사, 영상미에도 주목합니다."

이렇게 감정과 이성, 왼쪽 뇌와 오른쪽 뇌를 고루 작동하는 과정을 통해 윤 교수는 평론과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내조의 여왕'을 보고 난 뒤 그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서열 의식을 비판하는 평론을 썼고 드라마에서 웃음이 작동하는 과정을 집중 조명한 논문, '내조의 여왕의 희극성 고찰'을 발표했다.

- 책에 소개한 드라마 가운데 작품성과 시청률은 별개라는 평가를 하게 된 작품을 꼽자면.

"'막장드라마' 논란의 출발점이었던 '조강지처클럽(SBS)'은 상당히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작품성 면에서는 주목할 만한 점이 거의 없었습니다. 극단적으로 과잉되어 있는 등장인물들의 감정 상태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존경스러울 정도였죠. 반대로 작품성이 훌륭한데 시청률이 저조해서 안타까웠던 경우는 '인순이는 예쁘다(KBS2)'입니다. 김현주가 연기한 김인순이라는 여성은 여고 시절 과실치사로 친구가 죽어 전과자 신세가 됐는데 사회적 편견에 의해 불행하게 살아가죠. 괴로울 때마다 "난 사랑스럽고 예쁘고 훌륭해. 난 특별한 존재야. 난 선택받았어!"라는 주문을 외우는 동화 같은 이야기에서 인간에 대한 정유경 작가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표민수 PD의 감각적인 영상도 드라마를 보는 재미를 높여 주었는데, 안타깝게도 시청률이 저주해 '불우의 명작'이 되고 말았어요."

이번 비평집을 통해 평론한 드라마 18편의 주인공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배우로 윤석진 교수는 '태양의 여자(KBS2)'의 김지수를 꼽았다. 사진 제공 KBS.
이번 비평집을 통해 평론한 드라마 18편의 주인공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배우로 윤석진 교수는 '태양의 여자(KBS2)'의 김지수를 꼽았다. 사진 제공 KBS.

▶ 본방사수-실시간 녹화-IPTV…'생활이 드라마'

- 드라마 평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국문과 대학원에서 희곡을 공부할 때, 연극이나 영화와 달리 왜 드라마에 대한 논의는 찾아볼 수 없는지 답답했습니다. 특히 연극이나 영화는 그렇지 않은데, 유독 드라마에 대해서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잣대로 비판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죠. 드라마의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이었겠지만 그렇다면 제대로라도 비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러던 차 '한국 대중서사, 그 끊임없는 유혹'이란 책을 썼고 그걸 계기로 한 시사 주간지에 '파리의 연인'을 주제로 한 평론을 쓰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평론가로 활동하게 됐습니다."

- 드라마 비평가가 되기 위해 어떤 공부들을 하셨나요.

"국문과 대학원에서 희곡을 공부했는데 국문과는 영문과와 달리 희곡에 대한 인식이 빈약한 편입니다.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제가 공부하던 시절만 해도 국문과에 희곡 전임교수가 없는 대학이 많았죠. 저도 대학원 시절, 거의 독학 수준으로 공부를 했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한계를 느꼈어요. 그래서 국문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공연영상 전공의 석사 과정에 다시 입학했고 여기에서 대중문화와 대중예술에 대한 이론들을 공부하면서 드라마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게 됐죠. 다시 국문과로 돌아와 박사 과정을 하면서 대중극에 대한 주제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드라마 비평에 관심을 갖는 제자들에게 "비평 대상에 대한 애정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스스로도 같은 시간대 방영되는 방송 3사 드라마를 모두 챙겨 보기 위해 본방 사수, 실시간 녹화, IPTV를 모두 활용한다.

가장 재밌겠다고 생각한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고, 그 다음으로 관심 가는 드라마를 실시간 녹화한 뒤 연속 시청하고 그다지 끌리지 않는 드라마는 일주일 뒤쯤, 다른 일을 하며 설렁설렁 IPTV로 보는 식이다.

- 정말 좋아하는 일이 아니면 이렇게 드라마를 모두 챙겨보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10살 무렵, 그러니까 지금처럼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있지 않았던 시절,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테레비가게'에 가서 드라마를 봤던 기억이 나요. '청실홍실'(1975)이란 드라마에는 어린 나이에 소화하기 어려운 대사들이 많았는데, 정윤희가 연기하는 실연당한 여주인공이 "의연하게 살고 싶다"고 말했던 게 떠오르네요. '의연하게'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마음에 들어 혼자 이 대사를 중얼거리고 다녔죠. '테레비가게'에 어린 동생을 데리고 갔다 정신이 팔려 동생이 가벼운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어요. 그 바람에 어머니가 TV를 구입하셨죠. 길거리 전파상 앞에 서서 배고픈 줄도 모르고 봤던 똑순이 김민희 주연의 '달동네'(1980)도 제 추억 속 드라마 중 하나예요."

비평도 인간이 하는 일이다보니 개인적 감정이 깃들기 마련이다. 특히 배우에 대한 호감도가 비평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그는 이를 피하기 위해 "드라마의 내용이 당대 시대 정신과 어떻게 접목되고 있는지를 가장 우선시하고, 특정 배우에 대한 감정이 개입되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배우 중심으로 드라마를 보지 않는 편이라는 그가 그래도 자연스레 '팬심'을 품게 된 배우는 김명민, 이미숙, 고현정이다.

"김명민은 어떤 역할이든지 완벽하게 소화하면서 자신만의 캐릭터로 창출하는 능력이 뛰어난 것 같아서 좋아합니다. 이미숙은 나이가 들어서도 매력적으로 멜로 연기를 소화하는 능력과 카리스마, 캐릭터에 몰입하는 능력이 뛰어나 좋습니다. 고현정은 평소 특별히 굳어진 이미지가 없어 백지 같아 보이는데 캐릭터만 입혀지면 용암이 분출하듯 뜨거운 열정을 본능적으로 표출하는 느낌이 좋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세 편 가운데 두 편 역시 김명민, 고현정이 출연한 작품이다. '모래시계(SBS)', '거짓말(KBS2)', '하얀거탑(MBC)'이 그가 꼽은 명작들.

"모래시계는 천편일률적이던 한국 드라마의 소재와 주제에서 벗어나 정치적 격변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성찰한 점, 그리고 대사 중심의 연출을 탈피하고 영상 미학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합니다. '거짓말'은 사랑을 갈망하는 인간의 내밀한 심리를 탁월한 대사와 감각적인 영상으로 표현한 점, 그리고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주제 음악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얀 거탑'은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의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인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작가 또는 연출가가 있다면.

"현재 활동 중인 작가 중에서는 노희경, 이경희, 홍미란·홍정은 작가를 좋아하고 연출자 중에서는 표민수, 황인뢰 PD를 꼽고 싶습니다. 노희경 작가는 인간과 삶에 대한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는 점, 이경희 작가는 극적인 순간을 일상화시키는 구성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 홍미란·홍정은 작가는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각각 돋보입니다. 표민수 PD와 황인뢰 PD는 감각적인 영상미학을 추구하는 작가주의적 연출자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하고요."

- 드라마를 많이 보시다 보니 이제 몇 회 정도만 보면 '대박'이겠다, '쪽박'이겠다를 평가하실 수 있는 경지에 오르지 않으셨나요.

"예전엔 2회 정도까지만 보면 느낌이 왔었어요. 하지만 요즘 제작진들은 도입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어 초반에 힘을 많이 쏟죠. 그래서 기대했다 '용두사미'가 된 작품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요즘은 20부작 기준의 미니시리즈를 예로 들면, 6회 정도까지 봐야 판단이 가능합니다. 물론 여전히 드라마 첫 회를 통해 느끼는 '감'이라는 게 있죠. 캐릭터가 얼마나 잘 구축됐는지, 대사는 얼마나 생동감 있는지, 주제적 측면에서 시청자가 공감할 수 있는 현실감이 살아 있는지 등은 첫 회만 보면 대충 그림이 그려지죠. 신경통으로 비가 올 것을 미리 알아채는 할머니들처럼, 드라마를 보며 느끼는 '필'이라는 것도 있고요."

'모래시계'는 윤석진 교수가 가장 인상 깊게 본 드라마 가운데 하나다. 사진 제공 SBS.
'모래시계'는 윤석진 교수가 가장 인상 깊게 본 드라마 가운데 하나다. 사진 제공 SBS.

▶②편에서 계속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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