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손택균의 카덴차>빛 좋은 개살구, ‘초능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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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11일 17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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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울의 몇몇 음식점에 대한 불만. '음식 없음'이다.

멋진 건물, 적절한 눈높이의 인테리어, 고즈넉한 배경음악, 쾌적한 실내공기, 편안한 의자, 친절한 종업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아 보이는 메뉴와 와인리스트, 정갈한 그릇들.

아아, 완벽하다, 만족스럽다 싶었는데. 음식이 보잘것없다. 실망은 두 배.

10일 개봉한 '초능력자'는, 그런 음식점을 닮았다.

‘초능력자’의 메인 포스터에 쓰인 사진. 올해 초 ‘의형제’보다 더 빽빽하게, 여백 없이, 오로지 배우 얼굴로만 채웠다. 영화의 속내를 고백하듯.

사진 제공 비단
‘초능력자’의 메인 포스터에 쓰인 사진. 올해 초 ‘의형제’보다 더 빽빽하게, 여백 없이, 오로지 배우 얼굴로만 채웠다. 영화의 속내를 고백하듯. 사진 제공 비단

올해 '전우치'와 '의형제'로 연타석 흥행 홈런을 터뜨려 한국영화의 블루칩 자리를 굳힌 강동원. 1999년 '박카스' 광고로 대중에 얼굴을 알린 뒤 '근래 보기 드물게 성실하고 맑은 청년'의 호감 가는 이미지를 굳게 고수하고 있는 배우 고수.

이 투 톱 주연만으로도 '초능력자'는 이미 조커 두 장 받아들고 치기 시작한 원카드나 다름없다.

배우들의 연기는 좋다. 스타덤에 마음 흔들릴 시기를 넘긴 이 두 남자는 혼자 욕심껏 튀지도, 상대방을 억눌러 죽이지도 않으면서 바삭바삭한 리액션을 주고받으며 영화 전체의 톤을 적절하게 잡아나간다.

하지만 그뿐이다. 두 사람의 얼굴로만 미욱스럽게 가득 채운 포스터처럼, 이 영화의 즐길 거리는 오직 그저 강동원과 고수뿐이다.

딱히 문제될 건 없을지도 모른다. 9일자 동아일보 플러스 영화면 프리뷰 기사에 썼듯 두 배우의 팬들에게 이 영화는 거의 완벽한 은총이라 할 수 있다. 러닝타임 1시간 54분에서 두 사람 중 어느 한 쪽의 얼굴이라도 나오지 않는 분량이 얼마나 되려나. 물론 강동원의 팬 가운데는 뽀글뽀글 파마 헤어스타일의, 다리 한 쪽을 잃은 초능력자 강동원의 불편한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하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영화 초반 초능력자 강동원이 수족관 앞에서 뭔가를 생각하는 모습.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코엑스 아쿠아리움인가. 한번 가볼만하겠네.’ 그 생각만 들었다. 언론시사 장소, 마침 코엑스 메가박스였다.

사진 제공 비단
영화 초반 초능력자 강동원이 수족관 앞에서 뭔가를 생각하는 모습.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코엑스 아쿠아리움인가. 한번 가볼만하겠네.’ 그 생각만 들었다. 언론시사 장소, 마침 코엑스 메가박스였다. 사진 제공 비단

스타 파워로 포장한 흔해빠진 상업영화일 뿐인데. 뭐 그냥 마음 편히 즐기면 되는 것 아닌가…. 좋은 배우, 깔끔한 편집, 때깔 좋은 촬영, 말끔한 음향, 거기에 적당한 유머까지 얹었으니.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걸까.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영화는 뭘까. 큰 스크린을 통해 멋진 배우의 아우라를 시각적으로 풍성하게 소비하기 위한 상품?

나는, 영화란 '이야기를 영상으로 읽게 해 주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좋은 배우를 캐스팅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필요한 제작비를 끌어 모으는 일도 상상 못할 정도로 힘겨운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일단 좋은 배우와 어느 정도의 자본을 확보한 뒤, 어설픈 이야기를 얽어놓아 그 좋은 재료를 무안하게 만드는 영화들이 요즘은 왜 이렇게 많이 눈에 띄는 걸까.

'초능력자'에서 강동원은, 그냥 태어날 때부터 조각 같은 외모를 타고났듯, 눈빛으로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알 수 없는 이유로 태생부터 갖고 있는 인물이다.

능력이 생긴 까닭은 궁금하지 않다.

하지만 굳이 그가 좀도둑의 길로 들어서야만 했던 사연에 대한 이 영화의 설명은, 단출 간명하기보다는 빈약하고 무성의하다.

지하철역 격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한 규남(고수)을 초능력자가 희롱하는 장면. 초능력이 풀린 상태라 행인들이 멀쩡하게 지나다니는데, 사람이 머리에서 피를 콸콸 쏟고 있는데도 도움을 주기는커녕 비명조차 지르는 사람 하나 없다. 서울, 그렇게 막돼먹은 도시였나.

사진 제공 비단
지하철역 격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한 규남(고수)을 초능력자가 희롱하는 장면. 초능력이 풀린 상태라 행인들이 멀쩡하게 지나다니는데, 사람이 머리에서 피를 콸콸 쏟고 있는데도 도움을 주기는커녕 비명조차 지르는 사람 하나 없다. 서울, 그렇게 막돼먹은 도시였나. 사진 제공 비단

생부는 아닌 듯한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초능력으로 자살하게 만든 뒤, 그 능력을 두려워해 자신과 동반자살하려 한 어머니마저 위험에 빠뜨린 끝에 '세상에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단정을 내리고 가끔 사람들을 멈춰 도둑질을 하며 조용히 숨어 살고자 결심한, 초능력자.

그에 맞서는 전당포 직원 규남(고수)은 언브레이커블(unbreakable)이다. 몰매를 맞고 칼에 찔리고 차에 치이고 지하철에 받히고, 심지어 고층빌딩에서 떨어져도, 다치기는 하는데 죽지 않는다.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 '언브레이커블'에 등장한 초인보다는 미국드라마 '히어로즈'의 클레어 베넷에 가깝다. 손상된 신체의 회복력은 뛰어나지만 그 속도가 클레어처럼 놀랄 만치 빠르지는 않으므로 '신 시티'의 마브 같은 '맷집 히어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게 다다.

'얼음 땡' 능력을 발휘해 전당포를 털며 살아가는 한 초인.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앞에 어떤 까닭인지 그 능력이 듣지 않는 한 청년이 나타났다. 초인은 갖은 잔인한 수단을 동원해 그를 제거하려 하지만 그 청년은 '맷집 초능력'이 있어서 아무리 해코지를 해도 좀처럼 죽지 않는다. 결국 승리는 정의의 맷집청년이 쟁취한다, 는 이야기.

초능력자를 붙잡아 앉혀놓고 물어보면 어떨까.

-왜 규남을 그렇게 죽이려 애썼나요? 그냥 다시 안 만나면 그만이지.
"…그냥요."

-왜 사람들을 그렇게 막 함부로 죽였나요? 그냥 돈만 훔쳐도 괜찮았을 텐데.
"…그냥요."

아마 그럴 것이다.

중심 캐릭터 초능력자는 이름이 없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그가 하는 행동에는 납득할만한 이유가 당연한 듯 하나도 없다. 그냥 사이코인가? 세상을 왜 그다지도 저주하는가? 워낙 이유 없이 들이밀어지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이유를 묻는 것 자체가 결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드라마 '히어로즈'가 선풍적 인기를 끈 것은 초능력자들이 하늘을 날고, 불사의 몸을 갖고, 미래를 읽고, 시간여행을 하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관객을 그런 이야기로 몰입시키는 것은 불가해한 능력의 주인공들이 여느 인간과 다름없는 약점과 결함을 갖고 여러 가지 갈등에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공감을 얻기 때문 아닐까.

화보 같은 장면. 정말 많다. 잘 찍어서일까, 잘생겨서일까.

사진 제공 비단
화보 같은 장면. 정말 많다. 잘 찍어서일까, 잘생겨서일까. 사진 제공 비단

강동원과 고수를 멋있게 보여줬음 그만이지 뭐가 그리 불만이냐 라고 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내 생각에 어떤 영상물이 영화나 드라마로 불릴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독특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슈퍼맨은 외계인이다. 초능력을 가진 이유에 대한 설명은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가 왜 굳이 파란 타이즈 위에 빨간 팬티와 망토를 걸치게 됐을까…. 드라마 '스몰 빌'은 10년 동안 그 이유 하나만으로 10개의 시즌을 소화하고 있다.

'초능력자'에서 강동원은 그냥 '멋지게 생긴 나쁜 놈'이다. 고수는 그저 '마음씨 고운 맷집청년'이다. 두 사람은 성향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죽어라 싸운다.

이런 상황. 익숙한데. 어디서 겪었더라.

중학교 고등학교 때 반에서 벌어지는 싸움의 이유와 상황, 늘 그런 거였다.

"그냥 네가 너무 꼴 보기 싫어."

좋은 재료와 우수한 자재, 깨끗한 주방과 정갈한 식당을 갖고도 손님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탓할 것은 딱 하나, 요리사의 능력과 정성이다.

'초능력자'는 반짝이는 캐릭터 설정의 아이디어, 그리고 배우들의 긍정적 이미지에 거의 모든 것을 기댄 영화다.

관객은 바보가 아니다. 언제까지 겉치레만으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영화는 2시간짜리 TV CF나 패션쇼가 아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 [프리뷰]‘초능력자’… 미남초인-순수청년 외에 볼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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