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정신이 미래 파워]<上>‘스티브 잡스’ 못 키우는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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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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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력-자금조달 높은 벽… ‘기술형 혁신 창업’ 한국 최하위권

동아일보 기업가정신센터와 딜로이트컨설팅이 공동 실시한 세계 32개국 기업가정신 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은 2000년대 들어 순위가 계속 하락했다. 인구 100만 명당 특허건수, 국내총생산(GDP) 대비 로열티 수입, 하이테크 산업 수출액 비중 등의 대체 변수를 통해 측정한 성숙 기업의 부가가치 창출은 2000년 9위에서 2009년 4위로 계속 상승 중이다. 문제는 신규 기업 활동. 일자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창업하는 비율이 늘면서 창업 활동의 질이 크게 하락해 종합 순위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 창업 활동의 질적 저하 심각

창업 활동의 질적 저하는 미국 뱁슨대와 영국 런던비즈니스스쿨에서 주도해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기업가정신연구(GEM·신규기업 창업 활동에 초점을 맞춰 설문조사를 통해 국가별 기업가정신 측정) 결과와 일치한다. GEM 글로벌 리포트에 따르면 정규 고용기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자기 사업을 시작하는 ‘기회형 창업 활동’에서 한국은 2002년 조사 대상 37개국 중 5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2009년엔 이 순위가 조사 대상(혁신주도형 국가) 중 꼴찌인 20위로 추락했다. 반면 일자리를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창업에 나선 ‘생계형 창업 활동’ 비율은 같은 기간 6위에서 1위로 높아졌다.

한국의 기업가정신이 지속적으로 하락한 이유는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 활발했던 중소벤처기업의 창업이 ‘닷컴 버블’ 붕괴와 함께 점차 줄어든 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풀이된다. 1990년대 후반에는 정부의 강력한 벤처 육성 정책에 힘입어 정보통신기술, 전자부품, 반도체 등의 하이테크 산업에서 창업 활동이 활발했으나 2000년대 들어 닷컴 버블이 붕괴되면서 실패한 벤처 창업 사례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배종태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2000년 이후 스타 벤처기업은 늘지 않고, 우수한 인력은 창업을 꺼리고 있다”며 “특히 경제 활력이 저하되고 벤처 붐이 식은 후에는 기업가들의 위험 회피 추세가 강화됐다”고 말했다.

패자부활전이 허용되지 않는 문화도 기업가정신의 걸림돌로 지적됐다. 예컨대 국내 금융권에서는 벤처기업에 대출을 할 때 대표자 연대보증을 요구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 번 실패하면 재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다. 이에 따라 위험은 많지만 경제에 파급효과가 큰 기술형 혁신 창업은 줄어들고, 음식점 프랜차이즈 등 상대적으로 위험이 낮은 생계형 창업만 늘어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 과학기술 분야 종사자 인력 정체

이공계 기피 현상이 지속되면서 전체 일자리에서 과학기술 분야 종사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조사 대상 평균(29.8%)에 못 미치는 18.6%로 나타났다. 반면 2000년대 이후 기업가정신 경쟁력이 꾸준히 상승하고 있는 스웨덴과 덴마크는 이 비율이 각각 39.6%, 39.1%로, 한국의 갑절 이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성욱 딜로이트컨설팅 상무는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인력이 정체되어 있는 것은 혁신 제품의 수출과 특허를 주요 산업경쟁력으로 삼고 있는 한국의 현실에 비춰볼 때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인력 조달의 어려움도 한국 기업가정신의 근본적 도약을 막는 ‘고질병’이었다. 시장 환경 지표인 인력조달 용이성 측면에서 한국은 2000년 32위, 2005년 32위, 2009년 29위 등 만년 최하위권을 맴돌았다. 이는 시장 환경의 대표지표인 인력우수성 측면에서 한국의 경쟁력이 2000년 23위, 2005년 13위, 2009년 8위로 갈수록 높아지고 있는 것과 다른 현상이다.

경직된 노동시장이 그 원인으로 지목됐다. 인력조달 용이성 부문에서 상위권에 포진한 국가들은 대개 인력을 채용하고 해고하는 데 감당해야 하는 비용 수준이 낮게 나타났다. 지난해 세계은행(World Bank)이 발표한 ‘기업 하기 좋은 환경’ 조사에서도 한국은 종업원의 채용과 해고의 난이도, 비용, 경직성 등의 요소를 종합해서 매긴 점수에서 150위를 차지했다.

○ 창업 초기 자금 조달 어려워


투자 자금 조달 환경도 한국에서 기업가정신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조사됐다. 한국 벤처기업의 벤처 캐피털 이용접근성은 18위로, 비교할 수 있는 23개국 중 최하위권이었다. GEM 조사에서도 혁신주도형 국가에 포함되는 17개 국가 중 한국의 벤처 캐피털 이용접근성 경쟁력 점수는 2.34점으로 그리스(1.92), 아이슬란드(2.15), 이탈리아(2.23)에 이어 뒤에서 네 번째에 그쳤다.

반면 정부의 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은 3위로 세계적 수준이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민간 주도의 자발적인 중소기업 육성 환경이 매우 미흡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로 국내 벤처 캐피털의 투자 행태는 최근 10년간 매우 보수적으로 변했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국내 GEM 총괄 책임자인 반성식 진주산업대 교수는 “한국은 정부 보조금 지원 환경은 비교적 우수한 편이지만 벤처 캐피털을 통한 조달 환경은 열악한 편”이라며 “벤처 투자의 사각지대에 놓인 신규 기업에 대한 투자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펀드 조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벤처 캐피털의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금융인 출신 외에 실제 창업을 해본 경험이 있는 엔지니어 출신의 심사역이 많아져야 신규 기업을 중심으로 한 기업가정신 활성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창업에 성공한 벤처기업이 중견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2단계 기업가정신 대책’도 빼놓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김학수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에서 창업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지원 제도를 내놓고는 있지만 이들 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정책 마련은 미흡하다”며 “일단 창업에 성공한 기업은 무조건적인 지원보다 장기적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 어떻게 분석했나
기업활동 - 시장·정부환경 27개 척도로 측정


기업가정신 글로벌 경쟁력 평가는 동아일보 기업가정신센터와 딜로이트컨설팅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2009년 기준 인구 100만 명 이상 국가) 및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를 포함해 총 32개 국가를 대상으로 실시했다.

기업가정신 측정을 위한 기본 프레임워크는 강진아 서울대 교수, 김종호 부경대 교수, 김학수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 박유영 숭실대 교수, 반성식 진주산업대 교수, 배종태 KAIST 교수 등 동아일보 기업가정신센터 객원 연구위원들의 조언을 토대로 개발했다. 크게 기업 활동, 시장 환경, 정부 환경 등 3가지 범주로 나누고, 기업 성장 단계에 따라 신규 기업과 성숙 기업으로 구분해 측정했다. 특히 환경 요인은 시장 환경과 정부 환경 모두 각각 4개의 하위 범주로 나눠 측정했다.

세부 척도는 세계은행, OECD 등 국제기구에서 발표한 정량 지표를 주로 사용했다. 특허건수, 로열티 수입, 연구개발(R&D)투자 비중 등 기업가정신을 가늠할 수 있는 대체 변수를 활용했으며, 대체가 어려운 일부 항목에 대해서는 정성 지표를 도입했다.

세계은행, OECD 등 국제기구에서 발표한 정량 데이터 및 일부 정성 데이터를 토대로 총 100여 개의 측정 지표를 도출한 후, 결과(기업 활동) 지표와 원인(시장 환경·정부 환경) 지표 간 상관관계 분석을 통해 유의미한 척도 27개를 최종 선정했다.

상관관계 분석 결과, 환경 요소 중에서는 시장 환경 중 투자 자금조달 환경 측면에서만 신규 기업과 성숙 기업 간 유의미한 격차를 나타내 차이를 뒀다.

부문별 가중치는 동아일보 기업가정신센터 객원 연구위원 및 김인 딜로이트컨설팅 상무, 공미선 웅진씽크빅 경영기획실 부장, 안철수 KAIST 교수 등 업계·학계 전문가 15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해 계층화분석법(AHP·쌍대(雙對) 비교를 통해 중요도를 산출하는 방법)을 적용해 산출했다. 또 특별취재팀은 향후 국가정책 및 기업혁신에 참고할 수 있는 통찰을 얻기 위해 최고 수준의 기업가정신 경쟁력을 갖고 있는 미국 핀란드 싱가포르 등을 직접 방문해 취재했다.

딜로이트컨설팅은 세계 150여 개국 16만5000여 명의 전문가가 기업과 정부기관을 대상으로 전략, 운영, 인사조직 및 정보기술(IT)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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