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안현진] 미국에 뜬 홍길동 ‘레버리지’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12일 11시 2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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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리지'의 팀 멤버 5명이 모두 모인 포스터. 왼쪽부터 네이트, 소피, (창 밖의) 파커, 엘리엇, 하디슨.
'레버리지'의 팀 멤버 5명이 모두 모인 포스터. 왼쪽부터 네이트, 소피, (창 밖의) 파커, 엘리엇, 하디슨.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은, 그들이 원하는 건 뭐든지 빼앗아 갑니다. 우리는 그걸 다시 찾아주는 일을 하죠. 가끔은 '나쁜 녀석들'이 모여 최고의 '좋은 녀석들'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레버리지'를 제공합니다." '레버리지' 오프닝 中

"21세기의 로빈 후드", 한국식으로 말하면 "21세기, 미국으로 무대를 옮긴 홍길동과 활빈당의 모험담" 쯤 되려나? 미국 케이블채널 TNT에서 지난 7월 시즌4의 방영을 공식 발표한 '레버리지'의 스토리를 짧고 굵게 요약하면 그렇다.

▶ 도둑, 사기꾼, 해결사, 해커, 마스터마인드가 모인 드림팀

먼저 TV시리즈의 제목인 '레버리지(Leverage)'의 의미부터 따져보자. 굳이 따지고 시작하는 이유는 지렛대, 라는 사전적 의미로만 알고 있다가 이 드라마를 계기로 사전을 찾아본 나의 무지함 때문인데, 사전에 따르면, "레버리지를 제공한다"고 말할 때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 효력, 권력, 세력" 등을 의미한다고. 다시 말하면 '레버리지'는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의 횡포로 곤경에 빠진 시민들에게 소중한 것을 되돌려주는 의로운 무리가 주인공인 이야기다. 그리고 '로빈 후드'와 '홍길동'의 공통점이 역시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레버리지'의 주인공들은 도둑, 사기꾼, 해결사, 해커, 지능범이 모여 만든 의적계의 드림팀이다.

이 드림팀이 어떻게 모여 법을 어기며 선행을 저지르는가(?) 하는 이야기는 시즌1의 첫번째 에피소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네이트(티모시 허튼)는 전직 보험사의 조사관으로 여러 가지 도난 사건을 무사히 해결한 전력이 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아들이 희귀병으로 고통 받을 때 보험사는 "실험적 치료"라는 명목으로 치료비 지급을 거부했고, 네이트는 아들을 잃은 뒤 이혼을 겪고 알코올중독자가 된다.

그런 네이트에게 한 비행기 제조업자가 다가와 "나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며 사기를 의뢰한다. 그는 네이트가 맡은 건을 위해 내로라하는 각 분야의 전문가(절도, 해커, 회수전문가 등)들을 모아 주기까지 하는데, 결국 그 사건은 제조업자의 허위자작극으로 밝혀지고, 제조업자가 네이트를 비롯한 그 일당을 죽이려고 하면서 네이트와 일당의 목표를 바꾸어 놓는다. 다시 말하면 사건의 의뢰인을 한탕 털어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것으로 목표를 바꾼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재미있어지는 건 그 다음이다. 혼자 일하는 것을 철칙으로 알던 이기적인 전문가들에게 변화가 생긴 것. 도둑 파커(베스 리스그레프), 해결사 엘리엇(크리스천 케인), 해커 하디슨(알디스 하지), 사기꾼 소피(지나 벨먼) 등은 큰 그림을 그리고 작전에 집중을 높여주는 '마스터 마인드' 네이트와 함께 일한 경험을 잊지 못하고 앞으로 같이 좋은 일을 하자고 제안해 온다. 분명히 사기였고, 범법행위였지만, 이제까지와는 달리 그로 인해 부당하게 부를 채운 사람들을 혼내주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기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5명은 한 배를 탄다. 그들은 수임료 없이 의뢰인을 상담하고, 의뢰인이 원하는 것 이상의 경제적 도움은 물론 그들의 활동비까지도 톡톡히 챙기는,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방식으로 사기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

네이트의 작전에 따라 팀 멤버들은 가짜로 FBI요원, 신부, 수녀 등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네이트의 작전에 따라 팀 멤버들은 가짜로 FBI요원, 신부, 수녀 등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 에피소드 마다 펼쳐지는 한 편의 하이스트 무비

'레버리지'의 에피소드 한편 한편은 정해진 이야기의 구조를 가진다. 억울한 의뢰인이 찾아오고, 목표물을 조사한 뒤 네이트가 중심이 되어 '한탕'을 계획하고는 실행에 옮기는 식이다. 네이트의 작전은 5명의 팀 멤버가 적재적소에서 그 최고의 진가를 발휘하는 최적형으로 짜여진다. 예를 들어 건물에 침투해서 도면을 훔쳐오는 임무를 수행할 때, 파커가 건물에 침입하고, 하디슨은 네트워크 및 전기신호를 교란시키고, 엘리엇이 경비를 진압하면, 다시 하디슨이 컴퓨터를 해킹해서 목표한 물건을 훔쳐온다. 네이트는 본부에서 작전을 지휘하고, 소피는 필요할 때 현장에 투입되어 그럴 듯한 알리바이를 만들거나, 목표물에 접근해 떡밥을 뿌리는 방식으로 활동한다.

이렇게 '레버리지'는 5명의 팀워크가 작전대로 착실히 수행되어 팀워크를 발휘할 때 가장 큰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 '이탈리안 잡' '21' '오션스 일레븐' 등 고도로 설계된 트릭이 뒤늦게 밝혀지는 하이스트 무비(Heist Movie·범죄의 목적보다는 치밀한 과정과 속임수를 그려낸 영화)를 보는 듯한 긴장감도 선사하는데, 매번 에피소드가 끝날 때쯤 어떤 장면에서 어떤 트릭이 사용되었는지 공개해 시청자의 뒤통수를 친다. 처음에 보았을 때 실수를 하거나 위기에 빠진 듯 보였던 그 장면이 나중에 복잡한 퍼즐의 한 조각임이 밝혀질 때는, 이 떡밥을 물고 낚인 내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떻게 매번 그렇게 낚이는 건지!)

▶ 권선징악, 인과응보 등 고전적 재미로 인기몰이

네이트 일당의 활약상을 보는 것이 '레버리지'의 큰 재미라면, 이 드라마의 잔재미는 고지식하게 자기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아픈 기억과 비밀을 숨기고 있는 5명의 캐릭터에서 찾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레버리지' 팀을 이끌고 있는 네이트는 제일 첫 에피소드에서 "나는 도둑이 아니다"라고 반복해서 말하며 다른 팀 멤버들과 자신이 다른 종류의 사람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멤버들과 작전을 같이 하면서 그는 점점 자신이 더 이상은 법이 규정하는 착한 사람이 아님을 인정하게 되고, 시즌2의 파이널 에피소드에서는 "나는 도둑이다"라며 세상을 향해 외치게 된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음지에서 양지로 걸어 나오며, 의뢰인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감정을 나누는 다른 멤버들의 변화상 역시 네이트의 변화와 함께 입체적인 화음을 만들어낸다.

심각한 순간은 의뢰인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할 때 말고는 거의 없지만, '레버리지'는 그렇게 선과 악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것임을 역설한다. 너무도 고전적인 메시지의 반복에도 이 TV시리즈가 시즌4까지 예약할 수 있었던 건 그토록 고리타분한 메시지가 이 세상에 좀 더 울려 퍼져야 한다는 걸 시청자가 공감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탐욕과 부정을 징벌하고 못 가진 자에게 되돌려주는 '권선징악'과 '인과응보'를 주제로 내세운 '레버리지'는 솔직히 세련된 이야기라고 말하기에 부족한 구석이 많다. 매회 정해진 수순을 밟는 것도, 매번 같은 방식으로 시청자를 낚시질하는 것도 시즌3쯤 되니 뻔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탐관오리를 징벌하는 '홍길동전'을 읽던 서민적인 대리만족 때문일까? 학수고대하지는 않아도 계속해서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작전이 끝나면 둥그렇게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팀원들. 시간이 지날 수록 서로에게 가족같은 존재가 되어간다.
작전이 끝나면 둥그렇게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팀원들. 시간이 지날 수록 서로에게 가족같은 존재가 되어간다.

▶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그 재미, 계속 부탁해요~

처음에 '레버리지'는 시즌1로 완결되는 드라마로 제작됐다. 그렇기에 시청자들의 인기를 모으며 시즌2, 시즌3으로 이어진 이야기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펼치는 하이스트 무비 스타일의 복수극'에서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줄거리를 확장했다. 그래서 이전의 이른바 '나쁜 녀석들'이었던 다른 팀원들이 선행을 베풀며 그 재미와 보람을 알게 되는 것과 달리, 이전에 좋은 사람이었던 네이트로 하여금 점점 어두운 곳에 발을 들여놓게 만들었다. 한때 술을 끊었던 네이트는 시즌2에서 다시 술을 입에 대는가 하면 위험에 빠진 팀원들을 대신해서 경찰에 붙잡히기도 하고 탈옥해 수배자 신세가 되는 등 그가 이전에 가졌던 사회적 지위에 먹칠을 하며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매력은 비현실적으로 가벼운 분위기 그 자체에 있다. 네이트가 깊은 나락에 떨어지든 말든 이야기는 명랑한 결을 지켜낸다. 다른 TV방송국과 케이블 채널에서 보기 힘든 그 우스꽝스러운 가벼움이 이 시리즈를 차별화하는 장점이기도 하다. 네이트의 작전은 완벽하고 (완벽하지 않아도 언제나 해결 방법이 있다), 소피의 사기 연기는 100점이며, 하디슨은 어떤 네트워크도 해킹이 가능한 천재에다가, 파커는 좀처럼 감정을 내보이거나 흔들리지 않기에 감정의 동요로 팀워크가 위험에 처하는 일이 거의 없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구성 중에서도 최고는 엘리엇의 액션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해결사로 팀의 안전과 경호를 맡고 있는 엘리엇은 80년대 홍콩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무술을 펼쳐놓는다. 공중으로 던진 가방이 채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5명쯤은 가뿐하게 넉다운을 시키는 중원의 고수라는 이야기다.

어쩌면 이 가벼운 재미는 주인공이 곤경에 처하는 걸 보기 싫어하는 나에게만 유별난 재미일 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나 TV 속 이야기가 현실의 시궁창을 '레알'하게 보여줄수록 그것이 가공된 이야기이고 가공된 이미지인 걸 알면서도 괴로워서 몸을 뒤틀곤 한다. 이를 테면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만약 주인공이 겪는 시련과 고난이 자세하게 묘사된다는 걸 알면 스포일러조차도 달갑게 받아들인다. 반전에 대한 폭로만 아니라면 해피엔딩이 보장되어야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사견이다. 개인적으로는 픽션의 오락적 기능은 90% 이상이 현실도피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기에 '레버리지'의 가볍디 가벼운 그 분위기가 시즌4로 이어지는 행운을 누리는 것이 아닐는지.

안현진/ 잡식성 미드 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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