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공자 어깨 펴는 사회]<상>나라에 바친 삶, 서러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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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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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고지 영웅, 섬유노동자, 7남매 아버지…그가 남긴 건 月8000원 건보혜택뿐이었다

《조국 광복의 희열을 경험한 지 65년, 6·25 발발로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는 아픔을 겪은 지 60년. 한국은 잿더미가 된 나라를 일으켜 세계 10위 안에 드는 무역강국으로 도약했고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개최할 정도로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높였으며 세계를 향한 문화 콘텐츠 발신 기지로 떠올랐다. 그러나 오늘의 이 나라를 만들고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구해낸 은인들에게 우리가 보답한 것은 보잘것없다. 전문가들은 “국가의 유공자들에게 감사하는 보훈의식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 국가통합의 기초가 된다”고 말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보훈’이 가치를 갖는 이유 중 하나다.》
“아버지는 젊어서 적과 싸웠지만 그 뒤엔 평생 가난과 전투를 벌이셨어요.”

6·25전쟁 강원도 금성 샛별고지 전투 영웅인 백재덕 씨(1988년 사망)의 아들 백영배 씨(59·경남 김해시 삼정동)의 말이다.

1953년 5월 수도사단 기갑연대 분대장이던 백재덕 씨는 야간 매복 중 중공군과 부딪히자 “여기서 적을 꺾지 못하면 중대 주둔지가 위태롭다. 뼈를 묻자”고 분대원을 독려했다. 그는 혼자 적 10여 명을 사살했고 이 공로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2001년엔 ‘5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됐다.

외로운 흉상  부산 천가초등학교 천성분교에 2001년 세워진 샛별고지 전투 영웅 고백재덕 씨의 흉상. 이 학교는 내년 폐교될 예정이다. 백 씨의 아들은 “적절한 곳으로 흉상을 옮길 수 있도록 사회가 도움을 주기 바란다”고 했다. 부산=윤희각 기자
외로운 흉상 부산 천가초등학교 천성분교에 2001년 세워진 샛별고지 전투 영웅 고백재덕 씨의 흉상. 이 학교는 내년 폐교될 예정이다. 백 씨의 아들은 “적절한 곳으로 흉상을 옮길 수 있도록 사회가 도움을 주기 바란다”고 했다. 부산=윤희각 기자
“아버지는 평생 훈장이나 전쟁 이야기를 안 꺼내셨어요. 1970년대 후반 정부 관계자가 서훈자 실태 파악차 집에 왔을 때야 알았죠.”

1954년 예편한 백 씨는 고향인 부산 가덕도에서 물고기를 잡았고 아내는 미역을 땄다. 정부 지원은 없었다. 7남매는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백 씨는 1974년 경남 마산의 섬유공장에 취직해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1988년 숨졌다. 빌린 밭에서 깻잎 농사를 하는 아들 백 씨가 받는 혜택은 매달 8000원가량의 건강보험 혜택뿐이다.

2001년 부산 강서구 재향군인회는 백 씨 모교인 가덕도 천가초등학교 천성분교에 흉상을 건립했다. 하지만 이 학교는 내년에 폐교될 예정이다. 아들 백 씨는 아버지 흉상이 갈 곳을 잃을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조국에 몸 바친 분입니다. 잊혀진다면 서러운 일입니다. 적절한 곳으로 옮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립운동가 추산 권기일(본명 혁린·1886∼1920)의 손자 권대용 씨(61·광복회 경북 안동지회 사무장)에게 8월은 특별하다. 추산이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군의 총칼에 숨진 날이 1920년 8월 15일(음력 7월 2일)이다.

추산은 1912년 3월 26세 때 재산을 정리한 뒤 가족 12명을 데리고 만주로 향했다. 당시 그의 집은 30km 안에 남의 땅이 없을 정도였다. 20대의 나이에 재산을 처분한 돈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동기는 최근에야 알게 됐다. 안동 출신으로 1911년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한 석주 이상룡(임시정부 국무령)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추산은 석주의 참모 역할을 했으며, 추산의 죽음을 임시정부에 알린 사람도 석주였다.

추산이 34세에 숨진 이후 집안은 빈곤의 늪에 빠졌다. 추산의 아들 권형순 씨(1998년 별세)는 광복 후 안동으로 돌아왔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수레에 간장을 싣고 안동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2001년 ‘독립운동으로 쓰러진 한 명가의 슬픈 이야기’라는 책을 낸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54·안동대 사학과 교수)은 “문중을 중시하는 안동에서 안동 권씨 집안 종손이 간장을 팔러 다니는 것은 보통 사건이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권 씨도 중학교 1학년을 중퇴한 뒤 담배원료공장 등에서 일했다. 공부 욕심을 접고 1973년 시작한 택시 운전은 평생 직업이 됐다.

2006년 8월엔 신흥무관학교 터를 찾아 추산의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조부의 유품인 도장은 2007년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맡겼다. 추산이 1977년 건국포장(현재의 애국장)을 받아 권 씨는 20여 년 전부터 매월 60만 원가량의 연금을 받다가 수년 전부터는 110여만 원을 받고 있다. 2년 전 연간 30만 원의 의료혜택이 추가됐다.

권 씨는 ‘독립유공자 유족증’을 보여주면서 “공공시설에 들어갈 때 이 증을 잘 꺼내지 않는다”고 했다. ‘아저씨가 유공자는 아니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자주 듣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유공자도 3대까지만 인정되므로 광복회도 머잖아 존립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걱정했다.

대전에 사는 애국지사 김택점 옹(94)은 1944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이범석 장군을 지대장으로 하는 광복군 제2지대에서 지하공작을 수행했다. 임무는 일제에 강제 징집된 장병을 빼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돕는 것. 광복 때까지 23명을 구했다.

김 옹은 50년이 지난 1995년에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함께 투쟁한 동지들은 이미 여럿 떠난 뒤였다. 그가 살던 대전에도 예전엔 32명이 있었으나 지금은 3명만 생존해 있다. 신경통을 앓는 김 옹은 이들을 만난 지도 오래라고 말했다.

“10년 전만 해도 광복절 행사에 가면 많은 동료를 만날 수 있었는데….” 김 옹은 “올해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지 100년째 되는 해라는데 독립의 역사가 점차 잊혀지는 게 서글프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선대들의 희생으로 기초를 닦고 번영을 누리게 된 나라. 그러나 이 나라를 위해 젊음과 열정을 바친 세대는 망각 속에 사라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온당한 감사를 표해야 한다는 후손으로서의 의무 외에도 ‘보훈’의 가치는 오늘날 더욱 커지고 있다.

“보훈은 국가의 정체성과 국가라는 공동체에 대한 결속을 확립하기 위한 절대적 수단입니다. 이제는 한국인들이 세계로 뻗어나가고 또 다문화 사람들이 한국에 많이 들어와 사는데, 이럴 때 ‘국가가 나를 책임진다’는 인식이 있어야 국가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있죠.”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산하 보훈교육연구원 오일환 원장은 “국가가 사라지면 정치도 경제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보훈정신은 곧 국가를 유지하게 하는 기제”라고 말했다.

대전=이기진 기자 doyoce@donga.com
안동=이권효 기자 boriam@donga.com
부산=윤희각 기자 toto@donga.com
▼ 독립유공자-후손 인정받기는 ‘바늘구멍’ ▼

가족피해 우려 기록 안남겨… 6·25참전 예우는 더 낮아

현재 항일 독립유공자와 6·25 참전자들에 대한 예우는 보훈처가 담당하고 있다.

항일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는 다양하다. 건국훈장이나 포장과 대통령 표창을 받은 사람 등이 직접 대상자이며 배우자와 자녀 손자녀, 1945년 8월 14일 이전 입적한 며느리까지 유가족으로 인정된다.

보훈 급여액은 매달 42만3000∼405만4000원이며 각종 수당 60만∼100만 원이 지급된다. 유가족에게는 수업료 면제와 공무원 특별고용 및 취업 시 가산점 등의 혜택을 제공한다. 유공자와 배우자는 사망 시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이처럼 항일 독립유공자에 대한 예우 수준은 비교적 높지만 인정받는 것이 쉽지 않아 독립운동 유가족들은 이를 ‘바늘구멍’으로 비유하곤 한다. 보훈처는 절차상 명시적인 자료를 기초로 유공자를 지정하는데, 독립운동의 경우 대부분 신변 위험이나 가족에게 미칠 피해를 우려해 신분을 숨기거나 활동 당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독립유공자 발굴 및 조사를 위한 전담부서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6·25 참전자에 대한 예우는 항일 독립유공자와 비교해 열악하다. 65세 이상 참전자들에게 매달 9만 원의 수당을 지급하며 보훈 병원을 찾거나 보훈 요양원을 이용할 때 비용의 60%가 감면되는 혜택만 준다. 단 전사자나 신체 상해가 있는 참전자는 국가유공자(1∼7급)로 지정돼 배우자 자녀 조부모 등에게까지 다양한 혜택을 준다. 월 30만9000∼207만7000원의 보훈 급여를 지급하며 유가족에게는 중·고·대학의 수업료를 면제해준다.

6·25 참전자의 경우 물질적 예우 확대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예우를 정립하는 게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한 보훈처 관계자는 “항일 독립 유공자는 물질적 예우 외에도 사회적으로 존경 및 대우를 받지만 6·25 참전군인의 경우 2000년대 들어 일부 시민단체나 학생들에게서 ‘남북통일 방해 세력’ ‘민간인 학살범’이란 야유나 욕설을 듣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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