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口頭) 발주로 생산설비를 증설하라고 해 놓고 실제로는 다른 업체에 제품을 발주해 5억 원의 손해를 봤다.” 29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된 중소기업 실태조사 결과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이번 조사 결과를 보면 국내 중소기업의 고충은 크게 △불공정한 하도급 관행 △인력난 △자금 문제로 요약된다.
○ 울며 겨자 먹기로 납품
하도급 관계에서는 ‘납품단가 후려치기’가 가장 큰 문제였다. 업체 수가 많아 경쟁이 심한 휴대전화 부품업계의 한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매년 5% 이상의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하다 이제는 단가를 중국보다도 더 내리라고 요구한다”고 호소했다. “당국의 하도급 조사가 시작되면 대기업 구매담당자가 미리 전화해 지침을 내린다”고 꼬집은 기업도 있었다.
대기업이 납품단가에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반영해주지 않는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자동차업계의 한 중소기업은 “원자재 가격이 올랐는데도 상승분이 납품가에 반영되지 않아 연간 4억∼5억 원의 손해가 발생하고 있다”며 “현재 거래단절 위험을 무릅쓰고 항의 중”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 △1차 협력업체와 2차 이하 협력업체를 차별하는 문제 △제때 돈을 주지 않는 문제 △재고부담을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관행 등이 많은 지적을 받았다.
이와 관련해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은 29일 “(지금까지는) 대기업 납품단가 인하의 부당성을 공정위가 입증해야 했지만 앞으로는 대기업이 정당한 사유를 제시하고 납품단가를 낮추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납품단가 조정제도의 실효성도 제고될 것으로 보인다. 이 제도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납품단가에 불만이 있을 경우 납품단가 조정협의회에 신고, 조정할 수 있게 한 것이지만 실제 ‘찍힐’ 위험을 무릅쓰고 이를 이용하는 중소기업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김동선 중소기업청장은 “이의를 제기한 업체의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업종 조합이나 제3자를 조정채널로 활용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 내국인 채용은 꿈도 꾸지 못하는 3D업종
전통 제조분야의 한 중소기업은 “3D업종에서 내국인 채용은 꿈도 못 꾼다”며 “이런 상황에서 외국인 고용 쿼터까지 축소돼 중소기업 간에 인력 뺏기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제조분야 중소기업의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2010년 상반기(1∼6월) 제조업에 배정된 외국인 근로자 1만3500명이 고용신청 개시 후 한 달 만에 모두 소진됐을 정도다. 실태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뒤 이 대통령은 “외국인 근로자 쿼터부터 우선적으로 늘리라”고 지시했다. 외국인 근로자 쿼터 규모를 결정하는 국무총리실 산하 외국인력정책위원회는 30일 회의를 열고 확충안을 마련할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는 내국인들의 중소기업 취업을 장려할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 중기청은 공고를 졸업한 학생이 중소기업에 취직할 경우 일정 과정만 이수하면 대학 학위를 주는 ‘사내대학’ 도입을 논의하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중장년 미취업자들을 재훈련해 젊은 인재들이 꺼리는 제조업종에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그렇지만 우수 고급인력을 중소기업으로 유인할 대책은 여전히 마땅치 않다. 2007년 연구개발(R&D) 인력 확충을 위해 대졸 신입사원 19명을 뽑았다는 지방 도시의 한 반도체업체는 “당시 뽑은 19명 중 지금 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 여전한 자금난
자금 문제도 중소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수주 급감, 납기 지연, 발주 취소 등으로 현금 가뭄에 시달리는 조선업계의 한 중소기업은 “정책자금은 이미 소진됐다고 하고, 은행은 전보다 실적이 좋지 않다며 대출을 거부한다”고 하소연했다. 기계부품 분야의 한 중소기업은 “대기업 쪽에서 주문량을 늘려 시설을 확충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설비투자를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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