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 이제 8강이상 목표… 2% 부족한 ‘기술’ 키워야”

동아일보 입력 2010-07-17 03:00수정 2010-07-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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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으로 돌아간 허정무 前감독
허정무 전 축구대표팀 감독이 13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 자택에서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월드컵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이룬 그는 “모처럼 여유 있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좀 쉰 뒤 기회가 되면 K리그 팀을 맡고 싶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이젠 차기 감독에게 월드컵 8강 이상을 요구해야 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의 대업을 이룬 허정무 전 축구대표팀 감독(57)은 ‘야인’으로 돌아갔으면서도 한국 축구의 미래를 걱정했다. 지난달 29일 귀국한 뒤 2일 “대표팀 사령탑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그는 축구 원로와 친지들을 찾아 인사하고 지인들과 골프를 하면서 모처럼 여유 있는 생활을 즐겼다. 만나는 사람마다 “정말 아쉽다. 8강도 갈 수 있었는데”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단다. 13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 자택에서 허 감독을 만났다.》

○ 외국인 감독 선호 사대주의적인 분위기 많아

“제가 16강을 했다고 후임 감독 후보들이 부담스러워 안 하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잘못됐습니다. 대한축구협회나 팬들도 이젠 8강 이상을 요청해야 할 때가 됐어요. 한국 축구는 이제 국제무대에서 언제든 16강을 갈 실력이 됩니다. 그렇다면 목표는 더 높게 잡아야 합니다.”

허 감독은 목표를 높게 잡아야 한다면서 차기 감독은 그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국내 감독에게 기회를 준다고 하자 일부에선 외국인 감독을 기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외국인이냐 국내 감독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향후 한국 축구를 어떻게 이끌어갈지를 먼저 결정하고 그에 맞는 감독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그동안 외국인 감독을 무조건 선호하는 사대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한국에도 훌륭한 지도자가 많다”며 “한국 축구를 위해 지속적인 세대교체를 해 나가야 한다. 외국인 감독은 성적에 얽매여 이를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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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의 주역 거스 히딩크 감독을 제외하면 한국 축구에 크게 보탬이 된 외국인 감독은 없다고 평가했다. 움베르투 코엘류, 요하네스 본프레러,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등은 성적에 목매다 보니 대표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고 말했다.

○ “꿈나무에게는 재미를 주는 축구를 하자”

“월드컵을 치르면서 우리 선수들이 어렸을 때부터 기본기를 철저하게 다졌으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 축구가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2%가 부족해요. 그게 바로 기술입니다. 기술은 어렸을 때 완성됩니다. 꿈나무에게 성적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바꿔 축구를 즐기게 해야 합니다.”

허 감독은 골반 유연성을 강조했다.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가 전력으로 드리블하면서 90도로 한두 차례 완전히 꺾고 다시 자연스럽게 드리블할 수 있는 게 골반 유연성 덕분이란다. “골반 유연성은 어릴 때 완성됩니다. 재밌게 즐기게 하면서 기술을 가르치면 골반 유연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적에 얽매여 강훈련을 시키니 골반이 딱딱하게 굳고 말죠. 한국 선수들이 창조적인 플레이를 하지 못하는 원인입니다.”

○ “월드컵 16강은 소통의 산물”

“2008년 10월 주장이던 김남일을 대표팀에서 제외하면서 새 주장을 뽑아야 했죠. 내심 박지성을 지목하고 코치들에게 물어봤어요. 코치들은 이영표를 거론했죠. 하지만 나는 박지성이 돼야 팀이 잘 돌아갈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허 감독은 당시 이운재 이영표 염기훈 이정수 박지성 등 고참 선수를 모아놓고 “새 주장은 이영표가 하면 어떻겠느냐”고 떠봤단다. 그러자 이영표가 펄쩍 뛰며 “전 안 돼요. 지성이 시키세요”라고 했다. 다른 선수들도 모두 “그래요. 박지성이 적임자입니다”라고 거들어 자연스럽게 박지성에게 주장 완장을 채울 수 있었다.

허 감독은 “박지성은 책임감이 강하다. 최초의 프리미어리거임에도 언제나 솔선수범해서 후배들이 잘 따른다. 이운재 등 고참들도 박지성을 신뢰한다. 주장으로 적임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박지성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김남일과 안정환 등 2002년 월드컵 멤버들도 뽑았다. 고참들이 뒤에서 받쳐주니 박지성도 소신 있게 행동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중요한 경기 땐 선발 라인업도 물어보며 힘을 실어줬다. 허 감독은 “16강의 원동력을 굳이 찾자면 이렇게 선수들과 소통한 것이다”고 말했다.

○ “골프 바둑 당구는 스트레스 해소에 최고”

허 감독의 골프 스코어는 편차가 크다. 그는 13일에는 92개를 쳤다. 며칠 전에는 78개를 기록했다. 그는 “축구와 바둑, 당구는 승부욕이 생기는데 골프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냥 즐겁게 공을 치는 게 좋다”고 했다. 허 감독의 드라이버 거리는 300야드가 넘는다. 웬만한 파4에서는 원온도 자주 나온다. 하지만 워낙 장타이다 보니 OB도 많다. 스코어 편차가 큰 이유다.

허 감독은 바둑 아마 4단이다. 당구는 300점. 그는 “대학 이후 당구를 안 치다 최근 친구들을 만나 가끔 치니 스트레스가 해소됐다. 당구와 바둑, 골프는 팀을 이끌면서 내가 유일하게 스트레스를 푸는 창구였다”고 말했다. 허 감독은 바둑에서 축구를 배운다. ‘상대가 강한 곳으로 침투하지 마라’ ‘판 전체를 봐라’ 등은 축구에서도 꼭 지켜야 할 법칙이란다.

최근 이용규 교수의 ‘더 내려놓음’이란 책을 읽은 허 감독은 마이클 프란지스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라’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고집불통 ‘진돗개’의 이미지를 벗고 소통을 통한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변신해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이룬 배경에는 독서도 큰 몫을 했다. 허 감독은 “일단 푹 쉰 뒤 기회가 되면 K리그 팀을 맡아 우승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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