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권재현의 트랜스크리틱] SF연극의 등장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7월 1일 17시 52분


SF 연극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의 한 장면.
SF 연극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의 한 장면.
미래 사회에서 돌연변이 동물들이 인간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을 담은 SF 연극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에 등장하는 닭인간과 골든콕.
미래 사회에서 돌연변이 동물들이 인간에게 복수한다는 내용을 담은 SF 연극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에 등장하는 닭인간과 골든콕.
공상과학(SF) 연극이라는 말 참 익숙하지 않습니다. SF는 영화나 만화처럼 시각효과를 강조하는 분야에서 더 빛나는게 사실이니까요. 물론 시간여행을 한다거나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 같은 SF적 요소가 일부 가미된 뮤지컬이나 연극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과학기술문명이 발달한 미래세계를 무대로 삼은 공연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대학로에서 SF연극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5월에 공연된 극단 창의 '나는 오늘 개를 낳았다'(홍창수 작·연출)와 7월2일까지 대학로 게릴라극장에서 공연되는 극단 골목길의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김진우 작·박근형 연출)입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은 암울한 미래세계가 등장하고 개와 닭 같은 동물의 돌연변이가 인간을 응징한다는 반(反) 휴머니즘에 가까운 주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개를 낳았다'는 개와 함께 사는 이웃집 여인(박현미)을 짝사랑하는 삼류소설가(김중기)의 이야기입니다. 그 여인에게서 영감을 얻은 작가가 '개를 낳은 여인'이라는 SF소설을 써나가는데 그 이야기가 극중극 형식으로 펼쳐집니다. 미래에 개와 인간의 합성체인 도그험(doghum, dog-human의 줄임말)이 태어나는데 인간들이 이 도그험들이 모여 사는 도그험피아를 파괴하고 도그험을 말살하려 하는 과정에 한 간호사(김영미)가 도그험의 편에 서서 인간과 맞서 싸운다는 내용입니다.
SF 연극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 공연 모습.
SF 연극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 공연 모습.

'나는 오늘 개를 낳았다'가 극중극 형식으로 SF연극을 펼친다면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는 3차대전으로 폐허가 된 2050년 이후 세계를 무대로 우주선과 외계인이 등장하는 전면적 SF연극입니다.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는 '까망 치킨'이란 닭고기를 팔며 날아다니는 우주선 의 이름입니다. 이 '까망 치킨'에는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바로 3000년간 지구를 감시해온 쭈그렁이라는 외계인(박정순)이 전수해준 특별 레시피로 조리된다는 점입니다. 쭈그렁은 돌연변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인간만큼 지능이 좋아진 닭 '골든콕'(박노식)을 잡아오는 대가로 이 치킨집 사장인 도련(이호웅)에게 이 레시피를 전수한 것입니다. 여기에 골든 콕을 사랑하는 '닭인간'(김마리아)까지 등장합니다.

SF연극하면 놀라운 특수효과부터 떠올릴 분들이 많을 텐데 두 연극은 모두 조촐한 무대세트로 이를 대신합니다. '나는 오늘 개를 낳았다'의 경우 조명으로 미래 공간을 창출하고 사람의 몸에 개의 얼굴을 한 도그험의 분장 정도가 특수효과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는 은박지 커튼을 치고 사다리, 함지박, 카메라 삼각대, 대걸레와 같은 일상적 오브제를 조금씩 변형시켜서 우주선 내부를 꾸몄습니다. 사실적 묘사를 과감히 포기하고 어린이 같은 시각에서 일상적인 도구를 미래의 첨단장비로 전복시키며 웃음을 낳습니다.
극단 창의 '나는 오늘 개를 낳았다'의 공연 모습. 극중 개를 키우는 이웃집 여인을 짝사랑하는 삼류소설가는 '개를 낳은 여인'이라는 SF소설을 써나간다. 극중극 형식으로 SF연극이 펼쳐진다.
극단 창의 '나는 오늘 개를 낳았다'의 공연 모습. 극중 개를 키우는 이웃집 여인을 짝사랑하는 삼류소설가는 '개를 낳은 여인'이라는 SF소설을 써나간다. 극중극 형식으로 SF연극이 펼쳐진다.

두 연극은 이렇게 닮았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법은 천양지차입니다. '나는 오늘 개를 낳았다'는 세기말적 분위기에 어둡고 음울합니다. 개와 인간의 성적 결합에 대한 불편한 언급도 들어있습니다. 반면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는 키치 풍의 블랙코미디입니다. SF소설과 만화, 재즈, 거기에 오타쿠 문화가 뒤섞인 채 관객의 의표를 찌르는 웃음을 안겨줍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연극 후반에 쭈그렁이 인간과 닭에게 종의 명운을 결정하는 객관식 퀴즈 100개를 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쭈그렁은 물리학적 상식이 어느 정도 필요한 문제를 낸 뒤 다섯 개의 답변을 제시합니다. 인간과 닭인간이 번갈아 답변을 고르지만 오답 처리되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골든콕이 일어나 정답을 외칩니다. "꼬꼬꼬?" 관객이 허탈한 웃음을 머금는 순간 쭈그렁은 놀란 표정으로 "정답"을 외칩니다. 참고로 이 골든콕의 배역을 맡은 박노식 씨는 '살인의 추억'에서 "향숙이"를 입에 달고 다니던 백치 역을 맡은 배우입니다.

SF연극 '나는 오늘 개를 낳았다'의 공연 모습.
SF연극 '나는 오늘 개를 낳았다'의 공연 모습.

'스페이스 치킨 오페라'의 연출가가 극단 골목길 박근형 대표라는 점도 웃음을 머금게 만듭니다. 지난해 동아 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한 '너무 놀라지 마라'에서 영화감독인 맏아들이 화장실에서 목 매 자살한 아버지의 시신을 방기한 채 '제3의 방랑자'라는 말도 안 되는 SF영화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던 장면과 오버랩되기 때문입니다. 사실주의적 연기에 주력해왔던 골목길 배우들이 정색하고 황당하고 어이없는 이야기를 펼쳐놓는 점도 빠질 수 없는 웃음 포인트입니다.

2004년 방한했던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인간의 야수성을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잠재우고 길들이려고 노력해온 '휴머니즘 프로젝트'는 실패했다"는 발언으로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인간복제를 지지한 그는 자신의 사상을 반(反)휴머니즘이 아니라 포스트휴머니즘으로 규정했지만 인간을 중심에 놓은 휴머니즘조차 철학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그와 같은 포스트휴머니즘이 SF연극이라는 기발한 방식으로 발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포스트휴머니즘의 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요.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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