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78>

  • 입력 2009년 9월 10일 13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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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로봇과 인간 사이]

2046년 9월 12일 새벽 1시 30분. 대전시 서구 둔산경찰서 이의경 경사는 4년 동안 로봇행세를 하며 756명의 여성과 성관계를 맺어온 '레오나르도 말로'를 성폭행 및 금품 갈취 혐의로 스마트시티 광장에서 체포했다.

2042년 5월, 그는 대전 서구 지역에서 섹스로봇 대여 회사 '엔조이 파라다이스'(Enjoy Paradise)를 설립했다. '로봇과 인간의 섹스는 도덕적인 판단이 개입되지 않는다'는 2039년 판례를 근거로, 합법화된 섹스 사업 중 하나가 바로 섹스로봇 대여업이었다. 3년 사이 전국적으로 1,400개의 섹스로봇 대여회사가 문을 열면서 큰 성황을 이뤘다.

레오나르도 말로의 문제는 섹스로봇 대여를 원하는 여성들에게 섹스로봇 행세를 하며 그녀들과 상습적으로 섹스를 가진 후 돈을 받은 것이다. 그는 자신의 왼발을 바이오닉 풋(bionic foot, 생체로봇 발)으로 대체한 후, 발기지속제를 복용하고 찾아가선 섹스를 즐겨왔다.

'엔조이 파라다이스'는 결혼한 중년 여성 사이에서 비밀리에 큰 인기를 끌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중년 여성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회사는 '소속 섹스로봇의 수준이 거의 인간을 방불케 한다는 사실' 때문에 유명하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말로는 4년간 완벽하게 로봇 행세를 하며 여성 고객들을 속여 온 것이다.

4년 동안 700여 명의 여성과 성관계를 가지며 56억의 로봇대여료까지 챙긴 그가 경찰에 덜미를 잡힌 것은, 고객 중 한명인 최모 씨(26세,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푹 빠져서 대여신청을 하지 않은 그녀를 여러 번 찾아간 탓이다. 최 씨도 처음에는 '단골고객을 위한 서비스'라는 말로의 설명을 즐겁게 받아들였으나, 방문 횟수가 지나치게 잦자 의심을 한 것이다.

특히 그가 섹스 도중에 로봇이 보이기 어려운 섬세한 감정표현을 하고 요청하지 않은 애무를 주도적으로 시도하자, 최 씨의 의심이 깊어졌다. 그녀는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섹스로봇 행세를 한' 말로의 방문을 여러 차례 거절했고, 그가 행패를 부리면서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최 씨가 경찰에 신고한지 3일 만에, 갑천변 스마트시티 광장에서 경찰의 집중 단속에 걸린 그를 긴급 체포하였다.

레오나르도 말로의 집에선 노트 8권 분량의 '대여일지'가 발견됐다. 지난 4년 동안 대여 요청을 했던 여성 고객들의 주소와 스마트폰번호 뿐만 아니라 신체적 특징, 침실 분위기, 성관계를 나눌 때 여성의 애무 요청 사항과 반응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 게다가, 성관계를 나누는 동안 자신이 느낀 감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 만족도를 항목별로 점수로 표시해 두어 더욱 충격을 주었다.

그는 법정에서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고객들의 특징을 따로 기록해 두었다'고 담담하게 항변했다. 자신의 성적 느낌과 만족도를 적은 것은 그것이 '일지'가 아니라 '일기'이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자신은 로봇이 아니라서 일일이 기억할 수 없었다면서. 그는 결국 징역 13년형을 받았다.

로봇 행세를 한 인간 '레오나르도 말로'. 이 사건은 당시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여성 고객들은 그가 인간인 줄 몰랐을까? 인간이 로봇행세를 했을 때 과연 구별할 수 없었을까? 로봇과 섹스를 하는 것과 인간과 섹스를 하는 것이 구별 불가능한 수준까지, 우리의 로봇기술이 도달한 것일까? 혹시 700여명의 여성들이 로봇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말로와 섹스를 요청한 것은 아닐까? 말로의 변호인단은 끊임없이 그 가능성을 제기하며 강간이 아닌 '화간'이었음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로봇에게도 기억은 있다. 그들의 메모리 디스크를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로봇도 기억을 가질 수 있다. 냄새와 맛까지도 코딩할 수 있는 기술이 최근 등장하면서, 로봇들도 생활에서 얻은 오감(五感) 정보를 그대로 기억 속에 저장할 수 있는 기술 수준에 도달했다. 그것을 빠르게 재생하고 인출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 됐다. 어쩌면 인간의 기억보다 더 정확하고 방대하리라.

무사시에게는 글라슈트와의 끔찍했던 결승전 기억이 머릿속에 있을 것이며, 졸리 더 퀸에게도 잔인했던 4강전의 기억이 하드 디스크에 고스란히 저장되었을 것이다. 닥터 루스벨트도 16강전에서 슈타이거에게 얻어맞은 니킥 한방의 통증이 기억 속에 선명할 것이며, 팔이 잘리고 가슴이 두 동강 난 SRX 9000도 무사시의 잔인한 표정을 기억할 것이다. 기억이란 끔찍할수록 오래간다.

로봇들이 인간들과 일상생활을 공유하면서 디폴트(default)로 입력해준 지식만이 아니라 스스로 경험을 축적하고 기억을 만들어가게 됐다. 더 이상 '내밀한 기억'은 인간과 로봇을 가르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넘기는 '해마의 대체 칩'을 로봇들도 가지고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로봇들과는 달리, 인간은 기억을 추억한다. 오래된 기억을 꺼내 감정의 태그(tag)를 매번 새롭게 붙이고, 그 시간을 곱씹고, 그 사람을 그리워한다. 이런 시절의 기억은 끔찍하게 벗어나고 싶은 기억이 되었다가, 이내 즐거운 기억으로 바뀌었다가, 오랫동안 '아련히 그리운 기억'이 된다. 기억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경험의 질료'라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의 기억은 내일의 기억과 다르게 추억된다.

'기억을 꺼내 새롭게 추억하는 능력'은 로봇뿐만 아니라 동물들도 가지지 못한 능력이라고 믿고 있다. 아직 우리는 '지난 해 여름 치열했던 사냥을 추억하는' 사자나 '올 겨울 혹독한 추위를 이겨낸 침팬지'들의 무용담을 관찰한 적이 없다. 그들도 머릿속에 기억을 저장하고 있겠지만, 생존에 필요한 순간에만 인출했다가 이내 머리 한 구석에 처박아 버린다고 과학자들은 믿는다.

신경과학자들에 따르면, 기억을 추억하는 능력은 전전두엽과 측두엽에서 벌어진다. 감정적으로 평가하고, '그때 우리 정말 사랑했었지!'라며 실연의 고통에 새롭게 태그를 붙이는 일은 안와전두엽(orbitofrontal cortex)이 주로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안와전두엽은 수시로 오래된 기억을 꺼내 '재생(replay)의 즐거움'을 반복해서 만끽하게 해주며, 편도체에서 올라오는 감정적 반응을 평가해 '감정 태그'를 붙인다. 안와전두엽의 활동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왕성해진다. 새롭게 기억되는 것보다 오래된 기억의 양이 압도적으로 많아지는 나이일 때 말이다. 때론 그들은 하루 종일 안와전두엽만 사용하기도 한다.

무사시는 결승전의 기억을 전혀 추억하지 않겠지만, 글라슈트는 무사시와의 결승전을 추억할 것이다. 슈타이거는 4강전의 패배를 고통스럽게 추억할 가능성이 없지만, 글라슈트는 그와의 4강전을 오랫동안 추억할 것이다.

글라슈트에 얹은 뇌는 그들과의 격투에 과연 어떤 태그를 붙였을까? 통쾌한 한방? 고통스런 승리? 환희의 우승? 아니, 어쩌면 '벗어나고 싶은 순간'이란 태그를 붙였을지도 모르겠다.

영장류 진화 과정에서 가장 최근에 급속도로 발달하게 된 신피질(neocortex). 그 중에서도 인간의 고등한 사고를 담당하는 전두엽(frontal cortex).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모든 인지과정을 이 전두엽에서, 그 중에서도 앞부분인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에서 담당한다.

인간의 정체성은 과연 100그램도 채 안 되는 '전두엽'에 자리하고 있는 걸까? 인간 정체성의 무게가 겨우 100그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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