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72>

  • 입력 2009년 9월 2일 14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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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를 지켜 달라?

석범은 글라슈트가 지켜야 할 명예가 무엇일까 잠시 고민했다. 최 볼테르 교수의 명예라면 혹시 모를까.

"난 보안청 검사야."

보안청 검사는 거짓말하지 않고 불의를 보고도 눈 감지 않으며 살인범은 물론 공범까지 모조리 색출하여 감옥에 집어넣어야만 두 발 뻗고 편히 잠드는 족속이다.

"맞아요. 보안청 검사! 보안청 검사로서 임무에 충실하겠다고 맹세해줘요. 무슨 일이 있어도 사실을 왜곡하지 않겠다고. 그게 곧 글라슈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에요."

알 듯 말 듯 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지키는 일이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알겠어. 글라슈트의 명예를 지켜주지."

"연구파일에는…… 인간의 뇌만 따로 떼어 다른 곳에 이식한 사례 실험이 담겨 있었어요. 뉴욕특별시 콜롬비아신경학연구소에서 은밀히 행한 것이죠."

"다른 곳에 이식한 사례라고?"

"소나 말, 하마에 이식하기도 하고 또 로봇에 따로 넣어보기도 했지요. 물론 전부 실패했 지만."

"뇌만 옮긴다고? 그게 불법인 건 알지? 특별시연합의회에서 제정한 법률안에 의하면, 교체를 허용한 장기에서 뇌는 빠져 있어. 뇌를 마음대로 옮긴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 상상을 해봐. 건장한 노숙자를 납치해 그들의 몸에 불치병에 걸린 백만장자의 뇌를 심을 지도 몰라. 짐승의 몸에 인간의 뇌를 지닌 끔찍한 반인반수족들이 등장할 지도 모르고. 기계 몸에 뇌만 얹힌다면, 그땐 정말 인간이 로봇이 되고 로봇이 인간이 되는 끔찍한 세상이 열려."

"불사(不死)의 시대가 열리는 거예요. 뇌만 온전하다면, 비록 육체는 이리저리, 천연몸, 기계몸 혹은 짐승의 몸으로 바뀌겠지만, 결코 죽지 않는 시절이 도래하는 거랍니다. 이건 혁명이에요. 새로운 미래죠."

"아니야. 종말이지. 뇌를 자유롭게 옮기는 순간, 인간의 존엄은 사라지고 말아. 생지옥인 게지."

"그건 그렇다 쳐요. 난 연구파일을 최 교수님께 넘겨드리지 않았어요. 불법이고 또 적어도 서울특별시에서는 연구를 독점하고 싶은 욕심도 났지요."

"그런데 최 교수가 연구파일을 훔쳤다?"

"맞아요. 파일마다 비밀코드를 심어뒀는데, 최 교수의 청을 거절한 다음 날 보니 비밀코드가 모두 깨져 있었어요. 하지만 글라슈트의 머리에 사람의 뇌를 옮길 줄은 정말 몰랐어요."

석범이 양손을 흔들어댔다.

"자자, 정리를 해보자고. 그러니까 최 교수가 연구파일을 훔쳐 뇌 이식법을 익혔고, 그 후 사람을 죽여 그 뇌를 글라슈트에 옮겨 담았다? 하지만 어떻게 뇌를 글라슈트에 몰래 넣을 수 있었을까? 팀원들이 글라슈트 곁에 늘 붙어 있지 않았어?"

"SAIST 연구소에선 그렇지만, 통나무에선 달랐죠."

"통나무?"

"비밀연구소를 그렇게 불러요 팀원들끼린. 최 교수님은 시합과 시합 사이 늘 비밀연구소로 숨어들어가셨죠. 때로는 몇 시간 때로는 하루나 이틀도 그곳에 계셨어요. 최 교수님이 부르기 전에 우린 비밀연구소로 갈 수 없었고요. 가더라도 최 교수님 방엔 함부로 출입하기 어려웠죠."

"그 비밀연구소는 어딨어? 최 교수는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관악산 근방이죠. 최 교수님이 은밀히 연구할 곳을 찾으시기에 제가 쓰시라고 집 두 채를 내드렸죠. 지금이라도 안내해드릴 수 있어요. 위성사진이나 검색망으론 잡히지 않아요. 최 교수님이 미리 방해막을 쳐두었거든요."

석범이 말머리를 돌렸다.

"혹시 말이야. 최 교수가 반인반수족과 어울리는 걸 본 적 있어?"

"없어요. 그렇게 한가한 분이 아니란 걸 아시잖아요?"

"그렇다면 팀원 중에서는……?"

"……서 트레이너가 원숭이와 말의 하체를 지닌 반인반수족과 연구소 뒷산에서 만나는 걸 본 적은 있어요. 6개월도 훨씬 지난 일입니다. 추운 겨울인데, 어울리지 않는 셋이 어둑어둑한 산길을 내려오기에 기억에 남네요."

석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때 민선이 석범의 팔목을 쥐며 한 마디 보탰다.

"최 교수님은 극도로 분노한 뇌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글라슈트의 이상행동도 그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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