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73>

  • 입력 2009년 9월 3일 13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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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의 평행선]

보안청이 '글라슈트의 난동'으로 떠들썩하던 무렵, 일단의 무리들이 전격 체포되어 중구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상암동 로봇격투기 전용경기장 테러용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분당역 근처에 위치한 노숙자를 위한 숙박시설 '제 5 스위트홈'에서 숨어 지내다가 폐쇄회로에 포착되어 위치가 드러났다.

그들은 총 8명의 자연주의자로 판명되었다. 용의자들은 모두 '눈보라 뒤에'(옛 강원도 고성 지역의 왕곡마을) 마을에 거주하던 주민이었다. 오음산을 비롯한 경치 수려한 봉우리와 송지호 해수욕장을 가까이 낀 이곳에 대규모 리조트와 골프장을 세우고, 아시아 최고의 컨벤션 센터를 건립하는 사업을 특별시가 추진하자, 그들은 격렬한 반대 시위를 벌였고, 그 뜻이 제대로 통하지 않자 테러를 저지른 것이다. 오랫동안 자연과 함께 생활해 온 그들에게 이번 테러는 고통스러운 선택이었다.

테러용의자가 검거되자 신문기자들이 경찰서로 말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여기 한 줄로 앉으세요."

경찰이 퉁명스럽게 용의자들을 긴 소파의자에 앉혔다.

"앞으로 15분 정도 신문기자들과 간단한 인터뷰를 할 겁니다. 얼굴이 노출되지 않도록 저희가 개인 마스크를 드릴 겁니다. 물론 인터뷰를 하기 싫은 분은 안 하셔도 됩니다. 형식적인 절차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 줄로 길게 늘어선 그들 앞에 취재진들이 빼곡하게 모여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왜 테러를 저지르신 거죠?"

"그 동안 어디서 숨어 지내셨습니까?"

"지금 심정이 어떻습니까?"

"손미주가 사주한 것이 맞나요?"

기자들의 질문이 침을 쏘듯 이어졌다.

용의자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즉답을 피하는 사이, 갑자기 기자 한명이 뛰어 들어와서 경찰서장에게 소리쳤다.

"서장님, 잠깐 TV를 켜보시지요. 지금 어느 환경단체에서 성명을 발표한다네요. 테러 용의자들 검거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이라고 하는데요."

말단 경찰 한 명이 귀찮다는 듯 낡은 TV를 켜고 이리저리 돌려보는 시늉을 했다. 50여명의 사람들이 대여섯 줄로 맞춰 섰고, 반백의 사내가 중앙 단상에 서서 성명서를 또박또박 낭독했다. '서울환경개발 시민운동본부'라는 단체의 대표였다.

"우리 서울환경개발 시민운동본부는 지난 석 달 간 벌어진 무차별적이고 끔찍한 일련의 테러를 저지른 용의자들이 검거되었다는 소식에 기쁨과 안도를 전합니다. 아울러 그 동안 테러 용의자들을 추적하고 검거한 경찰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환경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닙니다. 자연주의자들이 마치 자연을 자신들이 소유한 것인 양 그것의 가치를 선점한 후, 자연을 개발하려는 모든 환경주의자들을 도시주의자, 과학기술지상주의자로 비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자연을 볼모로 도덕성을 독차지 하려는 의도 역시 불순해 보입니다. ……솔직히 얘기합시다! 우리 모두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갑자기 대표가 성명서를 읽지 않고 카메라를 보며 흥분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 시작했다.

"인간은 자연의 품에서 생존하고 생활하지 않고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런 자연을 보호하자는데,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거부하지 않는 진실은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입니다. 자연주의자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자연을 보호하자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 인간에게 유익하기 때문 아닌가요? 자연이 우리 인간보다 더 소중한 가치인가요? 저는 그런 생태주의자들의 위선이 역겹습니다. 그들도 결국 인간을 위해 자연을 보호하자는 것인데, 마치 도덕적으로 우위에 선 것처럼 행세하고, 환경주의자들을 개발주의자로 몰고 가는 것은 비겁합니다. 우리 모두 인간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자는 입장이며, 다만 그 방법에 차이가 날 뿐입니다. 결국 그들도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테러를 저지르지 않았습니까? 과학기술의 산물인 폭탄을 사용하지 않았……."

대표의 분노가 치솟기 시작하자, 경찰서장이 갑자기 TV를 껐다.

"이런 거 듣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심문을 벌여야 하니까요. 빨리 언론 인터뷰를 시작하죠."

"도대체 왜 테러를 저지른 겁니까?"

한 신문기자가 다짜고짜 정곡을 찔렀다.

용의자 중 리더로 보이는 사내가 갑자기 마스크를 내리더니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신문기자들도 흠칫 놀랬지만, 곧 카메라 플래시가 폭발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저런 기계문명에 경도된 개발주의자들을 응징하기 위해서!"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입장에 대해 어찌 생각합니까?"

"개새끼들! 환경은 소중한 것이라고? 항상 우리 곁에 두고 생활할 수 있도록,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도록 소중히 개발해야 한다고 떠들지만, '소중히 개발하겠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야!"

"테러를 저지른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동아일보 김남국 기자가 물었다.

"그래야 이렇게 우리 말에 귀 기울일 테니까. 잘 들어 둬. 자연은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잘 사는 사람들이 서울 시내에 자연과 녹지, 공원을 독차지 하고, 결국 가난한 자들은 서울시 외곽이나 다른 도시 주변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도 부족해서 그들의 삶의 터전인 자연을 짓밟고 그곳에다가 골프장과 리조트, 공항을 짓겠다고? 누구를 위해서? 그게 너희들이 주장하는, 자연을 소중하게 개발하는 거냐!"

"왜 하필 목표가 상암동 로봇격투기 전용경기장이었습니까?"

"그 끔찍한 대회를 너희들도 지켜봤지? 그게 바로 너희들이 말하는 기계문명이냐? 결승전과 4강전을 봤어? 그건 경기가 아니라 폭력이야! 로봇기술과 테크놀로지가 세상을 더 아름답고 깨끗하게 만든다고? 위선자들!"

"그럼 테러를 저지른 것에 대해 후회나 죄책감이 없습니까?"

"우리의 테러로 피해를 보신 관람객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있다. 하지만 당신 자식들이 기계문명으로 치러야할 피해를 생각하면, 그 정도 희생은 오히려 뜻 깊은 일이다."

"이 모든 테러를 손미주가 사주했나요?"

SBD 박상민 기자가 질문을 던지자, 그는 흠칫 놀라는 기척을 보였다.

"그렇지 않다. 그 분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그 분의 뜻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너희들이 이렇게 쉽게 말할 분이 아니다. 하지만 그 분도 로봇격투기 대회에 대해서는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힌 적이 있다. 우리는 그 분도 우리의 뜻을 충분히 이해해주시리라 믿고 일을 진행해왔다."

"자, 이제 심문과 조서 작성을 시작할 예정이니, 언론취재진들은 경찰서 밖으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이제 심문과……."

자연주의자의 테러는 용의자 검거로 일단락되었지만, 환경주의자들과 자연주의자들의 갈등은 봉합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자연을 파악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태도는 긴 평행선을 달려왔으며, 앞으로도 접점을 형성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 들어온 석범은 TV를 켜고 환경주의자들의 성명과 이번 테러용의자들의 인터뷰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인터뷰 중에 '손미주'라는 이름이 나오자, 가슴이 뜨겁게 아려왔다.

"어머니……."

석범과 미주의 갈등도 오랫동안 평행선을 달렸다. 항상 손을 먼저 내민 쪽은 미주였고, 석범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대화를 피하거나 서둘러 끊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녀와 속마음을 털어놓을 기회가 찾아오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서로의 상처를 보듬을 미래는 사라졌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두 사람의 평행선은 따듯한 화해 없이 화석처럼 굳어졌다, 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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