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71>

  • 입력 2009년 9월 1일 13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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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영상이 끝나기 전부터, 스미스 박사가 인간의 뇌를 강철구에서 끄집어내던 바로 그 순간부터, 석범은 민선의 표정을 관찰했다. 풍선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얼굴이여! 우승 축하연이 아수라장으로 바뀐 뒤, 석범은 글라슈트를 신속히 해체하여 이상행동의 원인을 규명하자고 주장했다. 로봇 머리에서 인간의 뇌가 발견되었을 때, 그는 물증 확인서에 사인한 다음 화장실로 직행하여 오랫동안 토했다. 토하면서 생각했다. 오랫동안 수많은 뇌를 보아왔지 않은가. 스티머스를 작동시키기 위해 처참하게 살해된 이들의 두개골을 직접 연 것도 여러 번이다. 현장에서는 물론이고 스티머스를 통해 그 뇌에 간직된 마지막 단기기억을 확인한 후에도, 속이 전혀 매스껍지 않았다. 구토는 커녕 <흙>에들러 선지피가 그득 담긴 해장국을 잘도 비웠다.

증거영상이 끝나자, 민선은 미간을 찡그리며 두 눈을 감았다. 충격을 받아 상기된 얼굴이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몸을 떨지는 않았다. 뇌신경과학자이니까. 뇌와 함께 밤낮 없이 살아온 사람이니까.

"알고 있었어?"

석범이 똑같은 질문을 세 번째 던졌다.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면 강하고 빠른 공격이 최선이다. 민선이 깊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내 탓이에요. 내 잘못이라고요."

뜻밖의 답이다. 알았다든가 몰랐다든가, 둘 중 하나를 기다렸는데, 반복된 자책? 석범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어 몰랐어?"

민선이 대답 대신 얼굴을 양손에 묻고 흐느꼈다. 어깨를 흔들며 애절하게 우는 그녀를 석범도 더 이상 몰아세우지 못했다.

이윽고 민선이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석범을 쳐다보았다. 안아 달라는, 안고 위로해 달라는 여인의 눈망울이다.

석범이, 방금 전에 퍼부은 질문을 머쓱해하며,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고목이 쓰러지듯 그녀의 머리가 어깨가 젖가슴이 그의 상체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또 1분 쯤 석범은 그녀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울음소리를, 등을 도닥이며 들어야 했다. 정말, 몰랐고, 지금 엄청난 충격을 받았음을, 민선은 온몸으로 전하는 중이었다. 석범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이 눈물은, 몸부림은 사실일까?

석범은 뇌가 사라진 연쇄살인이 시작되면서부터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연이은 테러와 성창수의 배신,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앨리스의 실종과 글라슈트의 머리에서 발견한 뇌에 이르기까지, 믿고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차례차례 무너졌다. 이제 민선만 남았다. 여기가 바닥이고 마지막 보루였다. 사랑한다고 '느끼고' 있는 여인.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여인. 이 여자를 믿지만 또한 철저하게 조사해야 하는 자신의 직업 때문에 내내 우울하고 짜증이 났다.

"……연구파일들이 통째로 사라졌을 때 눈치 챘어야 했는데……. 아, 정말 바보 같아."

민선이 이마를 석범의 어깨에 댄 채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석범이 황급히 민선의 팔뚝을 잡고 자신의 어깨에서 그녀의 머리를 떼어냈다.

"연구파일이라고? 무슨 연구파일?"

민선의 두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혹시 아닐까 잠깐 의심은 했었는데, 아니라고 믿었어요. 그런 짓을 했다가는 연구 자격을 박탈당하니까요. 더군다나 격투 로봇은 격렬하게 몸을 놀려야 하고, 또 언제 부상을 입을지도 모르니…… 바보 같은 짓이라 여겼답니다. 저렇듯 강철구를 만들어…… 내부를 검토하지 못하게 하는 건 상상을 초월한 일이니까요……"

석범이 민선의 팔뚝을 흔들어댔다.

"잠깐 의심하다니? 무슨 소리야 대체? 연구파일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봐."

민선이 석범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설명해 드릴게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이라고?"

"네. 조건을 들어주지 않으면 한 마디도 하지 않겠어요."

석범은 민선의 고집이 이제 낯설지 않다. 단두대에 목을 들이밀고서도 할 말은 하는 여자였다.

"알겠어. 뭐야 조건이?"

민선이 답했다.

"글라슈트의 명예를 지켜주세요. 그럼 처음부터 다 말할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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