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79>

  • 입력 2009년 4월 26일 12시 48분


제17장 기브 앤 테이크

강연회는 대성황이었다.

석범은 서둘러 말석에 자리를 잡았다. 강연이 시작되기까진 아직 1시간 10분이나 남았다. 지하 식당에서 모처럼 쌀밥에 된장찌개라도 먹을까 망설였는데, 여유를 부렸다간 입장 자체가 어려울 뻔했다.

보안청 관련 자료에 따르자면, 민선은 주 1회 이상 대중강연에 나섰다. 인종, 노소, 낮밤을 가리지 않았다. 단 한 차례도 무료강연에 응한 적이 없었다. SAIST 차세대로봇연구센터 전임연구원이 공식 직함이지만, 연구소로부터 받는 월급은 미미했다. 그녀는 시민강연을 통해 생활비를 해결했다.

과학 강연이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은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 강연은 대부분 작가나 연예인 혹은 학자의 몫이었다. 강연 전문 연예인들이 반짝 시민의 주목을 받다가 과학자로 무게 중심이 넘어왔다. 시민의 관심은 ‘특별시의 미래’였다.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바뀔 수 있는가’ 역시 강연회 때마다 제기되는 핵심 질문이었다.

‘뇌’는 반세기가 넘도록 미래 과학의 개척지로 주목받았다.

뇌를 연구하는 과학자 중 상당수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민 강연회장에 등장했다. 민선은 꼼꼼한 강연준비와 직설 화법으로 인기가 높았다. 격투 로봇 글라슈트 팀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강연료가 두 배로 뛰더니, 부엉이 빌딩 폭탄 테러의 생존자로 뉴스에 나간 후 강연료는 다섯 배까지 급상승했다.

오늘의 강연 주제는 ‘몽유’였다.

흰 가운을 걸친 민선이 단상으로 걸어나왔다. 화려한 의상을 뽐내는 강연자도 많았지만, 민선은 실험실에서 금방 나온 분위기를 풍겼다. 머리는 뒤로 돌려 묶었고 안경테는 굵었으며 왼 가슴에는 검은 펜을 꽂았다. 이 분야의 전문가라는 무언의 그렇지만 계산된 암시였다.

제법이군.

석범은 강연 참가자들의 손에 들린 공책을 살폈다. 민선은 시민강연에서 흔히 제공되는 강연파일을 제출하지 않았다. 참가자 모두의 손에 들린 공책은 강연에 대한 집중력을 높였다. 기억하기 위해서는 적어라! 빈손으로 덜렁덜렁 온 이는 석범 뿐이었다.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민선이 좌중을 훑었다. 석범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가볍게 웃었지만, 그녀는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재빨리 시선을 거뒀다.

“안녕하세요? 사이스트의 노민선입니다.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은 아마 한번쯤 어린 시절 잠꼬대를 해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낮에 받은 자극을 정리하고 에너지를 비축하기 위해 잠을 자야할 시간에 왜 우리는 몸을 뒤척이고 잠꼬대를 하고 그것도 부족해 ‘몽유’를 하는 걸까요? 저는 오늘 잠을 자는 동안 돌아다니는 ‘몽유’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몽유’(Somnambulism)는 흔히 ‘꿈속에서 놀다’는 뜻이지만, 꿈이 현실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죠. 일반적으로 몽유병은 성인에게는 매우 드문 현상입니다. 대개 5~12세 사이의 아이들에게서 흔히 보이다가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사라지죠. 몽유병에 걸린 아이들은 수면 상태에서 일어나 걷는다든지, 오줌을 눈다든지, 무언가를 먹는다든지, 몇 마디 말도 하지만 깨어나면 기억하지 못합니다. 악몽을 경험하면서 발작을 하기도 합니다.

이나영과 오다기리 조가 주연한 <비몽>이란 고전 영화가 있습니다. 이나영이 연기한 란은 수면 상태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헤어진 남자친구를 찾아가고, 섹스를 하기도 하는데 깨어나면 기억을 못합니다. 몽유 상태에서 자신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이것이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몽유 상태에서 누군가를 폭행하거나 살인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의지대로 저지른 유죄일까요, 병적 행동이기 때문에 죄를 물을 수 없는 걸까요? 실제로 1846년 뉴욕특별시에서는 몽유 상태에서 방화와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몽유병’으로 변호해 무죄 판결을 받은 사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악몽과 몽유는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컥 컥컥.”

난데없는 소음으로 강연이 중단되었다. 고요 속으로 다시 불협화음이 밀려들었다.

“크르릉 킁킁!”

코 고는 소리가 강연장 구석구석까지 울렸다. 뒤이어 민선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대체 누굽니까, 강연장에서 매너도 없이 코를 고는 사람이?”

석범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민선의 공격이 이어졌다.

“나가세요. 당장! 강연 분위기 흐트러뜨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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