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76>

  • 입력 2009년 4월 21일 13시 51분


돈은 말을 한다.

"다른 방도를 찾는 게 낫겠소."

볼테르는 짧은 문장 하나로 이야기를 접으려 했다. 민선이 연설하듯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찰스 사장을 만나서 무슨 얘길 나눴나요?"

볼테르가 그녀를 노려보며 되물었다.

"꼭 알고 싶소?"

민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노려보기만 해도 보르헤스와 세렝게티는 마음을 바꾸지만, 민선과 사라는 달랐다. 그녀들은 볼테르만큼이나 글라슈트를 아꼈고, '배틀원 2049' 우승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았다.

"거금을 줄 수 있다고 하였소. 빌려주는 게 아니라 아예 그냥 주겠다더군.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소. <보노보> 방송국이 개입되지 않고, 팀원들과도 무관한, 그렇지만 믿을 만한 사람을 정하면 그에게 돈을 건네겠다고 하였소."

"뭐라고 답하였습니까?"

"거절했소."

민선이 윗입술을 깨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깨끗하지 않은 돈이기 때문입니까? 불법이라서요? 물론 저도 한 점 티 없이 글라슈트가 우승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일을 어렵게 만든 사람은 최 소장님이십니다. 새로운 부품을 장착하면서 새로운 시스템을 운용하는 바람에 초과경비가 발생하고 글라슈트의 움직임 자체도 안전성이 현저하게 떨어졌습니다. 이 모두를 정상적으로 컨트롤하기 위해선 시간과 돈이 필요합니다. 시간이야 밤을 새워서라도 맞출 수 있겠지만 돈은 어렵습니다. 우승 상금이면 곧바로 갚을 수 있지 않나요? 이 정도 불법은……."

볼테르가 말허리를 잘랐다.

"불법은…… 나도 감수하려고 했소. 허나 찰스 사장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달았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라뇨?"

"대회가 끝난 후 글라슈트의 소유권을 넘기라고 하였다오."

"뭐라고요? 이 죽일 놈!"

보르헤스가 흥분했다.

"글라슈트를 주다뇨?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세렝게티도 맞장구를 쳤지만 민선은 침묵했다. 양손으로 긴 머리를 이마에서부터 쓸어 넘겼다. 참다못한 볼테르가 물었다.

"노박은 어찌 생각하오?"

'노박'은 '노박사'의 줄임말이다. 볼테르는 가끔 이런 식으로 호칭을 줄여댔다. '서사라 트레이너'는 '서트'라고 했고, '노민선 박사'는 '노박'인 것이다. 두 연구원은 뚱보와 꺽다리란 별명을 고집했다. 민선이 답했다.

"흠…… 나쁜 제안은 아니군요."

"돈 몇 푼에 글라슈트를 찰스 사장에게 주자는 겁니까?"

보르헤스가 볼테르보다 먼저 배를 한껏 내밀며 따졌다.

"'배틀원 2049'에서 우승하면, 우리 팀의 우수성을 특별시연합 전체에 널리 알리게 됩니다. 물론 우승 로봇 글라슈트의 인기도 하늘을 찌르겠지만, 글라슈트의 소유권을 찰스 사장에게 넘긴다 하더라도, 우린 얼마든지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 팀을 통째로 스카우트하려고 엄청난 연구비를 준비한 대학과 업체가 줄을 설 거라 이 말입니다. 그땐 글라슈트가 문제가 아니지요. 최 소장님과 우리들 실력이면 얼마든지 글라슈트를 능가할 격투 로봇을 만들 수 있지 않나요?"

민선의 논리엔 허점이 없었다. '배틀원'은 로봇 격투기를 통해 탁월한 로봇 연구 능력을 지닌 팀을 선발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월드 베스트로 인정을 받은 후엔 얼마든지 다양한 진로를 모색할 수 있다.

"이미 거절했소. 이 문젠 더 논의하지 맙시다. 내가 곧 다른 방도를 찾으리다."

"겨우 사흘 남았어요. 오늘 돈이 마련되어도 시스템을 100퍼센트 완벽하게 끌어올릴지 의문이란 말이에요. 차라리 다시 찰스 사장에게 연락하는 게 어떨까요? 마음이 바뀌었다고, 지금이라도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그만! 내 말이 말 같지 않소?"

민선도 지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요. 최 소장님 빈털터리란 거, 다른 방도 따윈 없다는 거 우리도 다 알아요. 설마 글라슈트랑 쌓은 망할 놈의 정(情) 때문에 찰스의 제안을 뿌리친 건 아닌가요? 맞군요. 정말 그래요. 로봇과의 정이라니! 이 따위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고도 최 소 장님이 공학자세요?"

민선이 분을 참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보르헤스와 세렝게티는 엉거주춤 서서 볼테르의 눈치만 살폈다. 볼테르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글라슈트에게 갔다. 민선의 울음이 오랫동안 연구소를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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