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만해 한용운과 일해 전두환

  • 입력 2009년 2월 18일 02시 58분


내설악 백담사에 다녀왔다. 불기 2553년 동안거 해제 날이자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한겨울 백담사는 소수의 등산객을 제외하고는 인적이 끊기다시피 한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백담 계곡에 눈보라가 몰아치고 얼어붙은 눈 때문에 일반 차량의 출입을 금지한다. 하지만 백담사 회주 오현 스님과 계간 ‘불교평론’ 편집위원 홍사성 형의 후의로 숙원을 풀었다.

이단아 만해의 복권·부활의 터

해제 전날 강원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 초입에 자리 잡은 ‘만해마을’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꼭 한 번 들러보고 싶었던 곳이다. 2004년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을 기념해 만든, 조촐하지만 선풍(禪風) 가득한 공간이다. 만해문학박물관, 문인의 집, 심우장, 서원보전, 님의 침묵 광장과 산책로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다. 건축가 김개천의 감각이 놀랍다.

만해는 사실 한국 현대 불교의 이단아였다. 1896년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1905년 백담사에서 계를 받아 출가했다. 3·1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무능한 조선 불교의 개혁과 현실 참여를 주장한 열혈승려였으니 당시 친일 종단이 그를 기꺼워할 리 없었다. 1926년 백담사에서 우리 시문학사에 길이 남을 시집 ‘님의 침묵’을 탈고해 특유의 은유로 국혼을 일깨우면서 중생 제도를 노래한 민족시인이기도 했다. 변변한 제자를 두지 못했고, 결혼으로 딸까지 둔 그의 ‘승려적 존재’는 광복 후 한국 불교계에서 잊혀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교과서 등에 실린 만해의 주옥같은 시는 많은 이에게 애송됐고, 아무 인연의 끈도 없는 오현 스님과 문단 인사 등을 통해 백담사의 상징이자 지조 있는 민족시인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다음 날 백담사로 가는 길은 조마조마했다. 사륜구동 차에 몸을 싣긴 했으나 초입부터 차가 눈길에 미끄러져 빙그르 한 바퀴 도는 바람에 아찔했다. 한낮 전국의 기온이 영상이었으나 백담계곡 안은 찬 바람이 몰아쳤다. 산문(山門)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7km 내내 눈이 쌓여 있었다. 평소 차량으로 12, 13분이면 되는 거리가 30분이나 걸렸다.

불현듯 1988년 11월 23일 일해 전두환(日海 全斗煥)의 ‘백담사 귀양길’이 떠올랐다. 혹독하게 추운 날이었다. 권좌에서 물러난 전 씨가 사과 담화 발표 후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수십 명의 기자가 용대리 입구까지 그를 쫓았다. 당시만 해도 백담사는 ‘숨어 있는’ 절이었다. 한 달 넘게 기자들은 인근 여관 등지에서 진을 치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해야 했다.

당시 백담사는 전기도 안 들어오고 수세식 화장실과 욕탕도 없는 곳이었다. 법당을 포함해 건물도 세 채밖에 없었다. 전 씨는 “요즘은 지옥에도 전기가 들어오고 수세식 화장실도 있다는데 여기는 그것도 없느냐”며 허허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유배’ 全씨의 독설·회한의 장소

날씨가 풀리면서 전 씨 내외는 마당에서 도후 주지 스님과 배드민턴을 치는 등 적응해 갔다. 전 씨는 자신을 ‘관람’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설법에 가까운 일장 훈시를 하기도 했다. 전 씨가 후임자의 친위대 몇몇을 겨냥해 “손볼 사람 몇 명 있다”는 말을 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100여 일쯤 지난 어느 날, 새벽 예불을 마친 전 씨는 주지 스님 방에서 차 한잔을 청해 마시다 앞산에 걸린 달을 보고 “이제 와서 보니 나를 이곳에 보낸 사람들이 은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 씨 내외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긴 2년 1개월여 동안 이곳에서 기거한 뒤 1990년 12월 30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사저로 돌아갔다.

승려 시인 만해와 장군 출신 대통령 일해. 세속의 지위에는 큰 차이가 있었으나 훗날 역사와 백담사는 이 둘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백담사에는 만해기념관만이 있을 뿐이다. 백담계곡의 돌탑들이 동안거를 마치고 만행을 떠나는 스님들에게 합장을 하고 있었다.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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