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25>

  • 입력 2009년 2월 9일 11시 56분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거창하게 찾아들지 않는다. 종이에 잉크가 스미듯, 한 시절을 지낸 후, 아! 그때였구나, 혼자 눈물 흘리는 식이다.

"어머니!"

석범은 소리친 뒤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는 항상 이랬다.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결정 사항을 전했다. 석범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인간은 누구나 나고 죽는 법이다. 반년도 감사하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사람답지 않게 차분하고 담담하다. 석범은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페이빈인데 왜 아직 거기 계신 겁니까? 특별시 조류독감 지정 병원에서 격주 1회만 토미플루(TomiFlu)를 투약하면 20년은 거뜬한 걸 모르세요?"

"얘야. 나는 어떤 화학약물도 투여 받지 않겠다고 맹세했단다."

자연인 그룹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기계몸을 거부하는 그룹과 기계몸은 물론 화학약물까지 거부하는 그룹. 미주는 완고한 후자 그룹의 리더였다.

"멋지십니다. 숭고한 자살이군요. 왜 하필 지금 이 얘길 하시는 거죠? 죽기 전 엄마의 마지막 소원 운운하며 울음이라도 터뜨리실 건가요? 난센습니다, 이미 사망 처리된 사람이 다시 죽음을 이야기하는 건."

특별시민이 오염지대로 가거나 오염지대 거주자가 특별시로 오려면 긴 시간 동안 까다로운 심사를 받아야 했다. 심사를 피하려는 이들은 신분세탁을 했다. 사망 혹은 실종 사건을 조작해서 자신의 존재를 지운 후 원하는 지역으로 숨어드는 방식이었다.

석범도 신분세탁을 권유받았다. 2036년, 특별시를 빠져나갈 때 긴급체포를 염려한 미주가 위장 자살을 계획한 것이다. 석범이 완강하게 반대하자, 미주만 자동차 사고로 실종된 것처럼 꾸민 후 특별시를 떠났다.

"네가 원하면 이곳에서 남은 반년을 함께 지낼 수 있단다. 죽음을 맞을 채비를 해야 하니, 공식 업무도 곧 다 정리할 예정이고. 내 병을 핑계거리로 삼는 건 물론 아니란다. 다만 어미로서 자식 걱정은 당연한 일이지."

"걱정이 되시면……하아아!"

석범이 고개를 들고 잠시 머뭇거렸다. 고인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정말 제가 걱정이 되시면, 거기서 나오세요. 그리고 토미플루를 투약하십시오."

"변절하란 말이냐?"

변절이란 단어가 귀를 파고들었다.

"부탁이란다. 죽기 전에 챙길 일 중 하나라고 해두자. 꼭 결혼하라는 것도 아니다."

"싫다면요?"

"얘야! 엄만 너와 더 자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단다. 시간이 없어. 이걸 첫 시도로 받아들여 주렴."

"전 오염지대로는 안 갑니다, 절대로! 농사 따윌 지으며 시간을 흘려보내지도 않을 거고요. 기대하지 마십시오."

"안다. 내가 특별시 체제를 부정할 자유가 있듯 너도 특별시 체제를 위해 헌신할 자유가 있겠지. 짧은 여행이라고 해두자. 둘이 같이 오면 더욱 좋겠고."

"그 여자도 자연인 그룹입니까? 어머니완 무슨 관계죠?"

"직접 만나서 물어보렴. 그럼 난 가야겠다. 오늘 마을 아이들과 단풍나무 시럽을 만들기로 했단다.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 또 연락하마."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석범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격한 감정을 다독였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그였지만, 어머니 앞에서는 속마음을 숨기기 어려웠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혈육에게 버림 받았다는, 아물기에는 너무 깊은 상처였다.

홀로그램이 다시 떴다. 남앨리스였다. 그녀 뒤로 보안청 건물이 보였다.

"어디세요?"

"거의 다 왔어. 밀무역상들에 대해 더 알아낸 거 있어?"

"특별한 건 없습니다. 유전형질연구소 쪽 해킹 의심 사항들을 훑었고요."

"사망자 신원은?"

"그게…… 본명은 강정수, 35세, 전과기록은 없습니다. 이상한 사실은 2041년 3월 21일 오염지대에서 산불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나옵니다."

"불에 타 죽었다고? 확실해?"

"신분세탁을 한 것 같습니다."

멀리 앨리스가 보였다. 그녀도 석범의 차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보름 만에 찾아온 달콤한 휴일을 자진 반납한 것이다.

"신분세탁……젠장, 어머니!"

갑자기 석범이 자동차를 되돌렸다.

아무리 미워도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선 첫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차도로 한 걸음 내려선 앨리스가 손을 든 채 황당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미안. 점심은 혼자 먹어."

석범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링크를 다시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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