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24>

  • 입력 2009년 2월 8일 13시 57분


6. 모든 만남은 필연이다

오! 놀라워라. 참으로 많은 우연이 당신과 나 사이를 이었다. 그 중 하나만 어긋났다면,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았을 것이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여 지금의 '우리'가 되지 않았으리라.

차에 오른 석범은 보안청까지 '자동 운전'으로 설정한 후 모든 링크를 끊었다. 좌석을 젖혀 침대로 바꾼 후 눈을 감고 드러누웠다. 러시아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시 '추신'이 저도 모르게 혀끝으로 밀려올라왔다.

"아닙니다, 당신 슬픔은 나 때문이 아닙니다 / 당신이 고국을 떠난 것은 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눈을 번쩍 떴다. 흰 숄을 머리에 두른 낯익은 중년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나는 로봇에 반대한다』와 『도시의 종말』의 저자이자 석범의 어머니인 손미주였다.

"제발, 제발 절 놔둬요."

어머니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의 뇌로 곧장 찾아들었다. 그때마다 석범은 불쾌하고 화가 났다. 마음대로 찾아들기는 달마동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컨설팅이란 형식으로 석범의 바깥에 머물렀다. 텔레파시를 통한 어머니의 방문은 안팎 낮밤 구별이 없었다.

못 다 외운 시를 이었다.

"그 진홍빛은 나의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 아닙니다. 당신 슬픔은 나 때문이 아닙니다…… 젠장!"

갑자기 욕을 하며 주먹으로 링크 복원 버튼을 힘껏 쳤다. 쿵 소리와 함께 홀로그램이 떴다. 세상과 이어지자마자 달마동자보다도 먼저 그를 방문한 이는 역시 어머니였다. 하얀 숄을 두르고 동백나무숲을 배경으로 그루터기에 앉았다.

"얘야. 어서 차를 돌리렴."

미소를 머금었지만 목소리는 차고 단정했다.

"제 인생입니다. 간섭 마세요."

"네 인생이니 간섭 말라고?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2036년에도 고집을 부리더니 결국 한 짓이 뭐냐? 발목이나 자르고 정신병원 신세를 지지 않았어?"

어머니 때문이에요!

석범은 차마 이 문장만은 뱉지 못했다.

2036년 한 달 동안 농촌회귀[rural rebound]를 강요하지 않았다면, 석범만 두고 떠난 후 지금이라도 잘못을 인정하면 용서하고 받아들이겠다는 암시를 두 달 동안 저녁마다 주지 않았다면, 석범은 하이하이, 선생님! 문하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확신에 찬 어머니와 아무 것도 믿지 않는 아들. 이 평행선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제 인생입니다. 간섭 마세요."

석범은 자동응답기처럼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반복했다.

"혼자 세상을 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너는 아직 모르는구나."

"전 혼자가 아닙니다. 동료도 있고……."

"그만! 특별시에서 매일 다섯 개의 청(廳)이 생기고 또 다섯 개의 청이 사라진다는 걸 모르진 않겠지? 당장 내일 어떻게 바뀔 지도 모르는 곳에서 어울리는 이들은 동료도 뭣도 아니란다."

석범이 단칼에 잘랐다.

"여자 만날 시간 없습니다. 더더구나 어머니가 권하는 여잔……."

"넌 왜 네 생각만 하니? 이건 작은 일이 아니다."

"그렇겠지요. 지구를 바꾸는 담대한 일이겠지요."

변하지 않은 것은 석범뿐만이 아니다.

미주 역시 병든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헌신하겠다는 결심엔 흔들림이 없었다. 인류가 지구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는 하루 한 끼 그것도 채식만 고집했으며 스스로 병을 진단했고 기계몸이나 화학약물을 철저히 배제했다. 2040년 이전에는 강대국에 맞서 싸웠고 2040년 이후에는 나날이 비대해지는 특별시의 횡포를 폭로하며 특별시연합의 부도덕성을 고발하기 위해 분주했다.

2036년부터 '코이브 에코토피아(Co-ev Ecotopia)'를 제안하고 이끌었다. 『특별시연합공용어사전』에 의하면, 코이브 에코토피아는 도시 문명을 버리고 지구 생태계 안에서 동식물과 공생하며 생태적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운동으로, '코이브'는 공생을 의미하는 co-evolution의 약어다.

첫 이주자는 당연히 미주였다.

"얘야! 사랑한다."

사랑! 두 글자가 파르르 떨렸다. 석범은 화를 삭이지 못하고 비꼬았다.

"압니다. 그 망할 사랑 탓에 저를 특별시에 버리고 코이브 에코토피아로 떠나신 게지요."

미주가 잔기침을 뱉은 후 말했다.

"페이빈(FAVIN, Fatal Avian Influenza)에 걸렸다. 길어야 반 년이라는구나."

『연합시공용어사전』에 의하면, 페이빈은 오리를 대량 양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조류독감의 악성 변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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