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21>

  • 입력 2009년 2월 3일 13시 43분


반복은 고통이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같은 시각에 같은 짓을 하는 것, 더군다나 결과가 좋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10년이란 시간이 부여된다는 사실은 삶 전체를 초조하게 만든다.

보안청 검사가 되고 나서도 뇌파 작곡은 이어졌다.

10년 동안 불협화음이 단 하루도 열 번 이상 나오지 않아야만 이 지긋지긋한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석범이 지은 곡들은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격무에 시달리느라 불협화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기껏해야 서너 번이었다.

오늘은 심상치 않다. 벌써 여섯 번째다. 네 번만 더 음이 빗나가면 그 동안 들인 공이 헛되고 만다. 괴한들과 격투를 벌인 일이 어디 한두 번인가. 한숨 푹 자고 나면 뇌파는 정상으로 돌아와 있곤 했다.

일곱, 여덟!

식은땀이 흘렀다.

꿈 때문이다. 청소 로봇과의 전투 마지막에 하이하이! 선생님의 교신 신청을 수락하는 꿈.

하이하이! 이번에는 폐를 찔러. 척추를 부러뜨리는 건 어떨까. 혀를 잘라 소금에 찍어 먹는 맛도 쏠쏠하겠지? 뭘 망설여? 벌써 다 잊은 거니? 어서 시작해.

잠에서 깬 후에도 빠르고 달콤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아홉!

아, 정녕 이 짓을 10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리듬인브레인! 당신의 오늘을 더 높게 당신의 내일을 더 아름답게! 리듬인브레인!"

뇌파 작곡을 마치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아직 측정시간이 15초나 남았다.

"곧장 귀가해서 쉬라고 했죠?"

달마동자였다.

아바타 컨설턴트에게도 정(情)이 있을까.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나를 돕는 것은 정 때문일까 아니면 또 다른 프로그램이 작동한 탓일까. 하마터면 고마워! 인사를 건넬 뻔했다. 석범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정겹게 굴어도 달마동자는 특별시에서 붙인, 먹지도 자지도 않고 24시간 내내 석범의 심신을 살피는 홀로그램 감시자다.

"자 어서어서 서두르세요. 노총각 냄새 펄펄 풍기면서 나가는 건 이만저만한 실례가 아니죠."

"알아서 할게. 귀찮아."

일부러 역정을 냈다. 달마동자가 사라지자 비로소 긴장이 풀리면서 배가 고팠다. 불협화음 아홉 번에 헛배가 불렀던 것이다.

아침식사용 알약을 하나 입에 털어 넣고 말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제도 그제도 쌀밥 구경을 못했다.

"콩 나 물 해 장 국!"

여섯 글자를 또박또박 끊어 읊었다.

부엌 벽과 천장에서 기계팔 스무 개가 튀어나와 흔들렸다. 접시를 꺼내는 팔, 도마를 줍는 팔, 식칼을 드는 팔, 콩나물을 다듬는 팔, 국을 끓이는 팔, 양념을 집는 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1번 3악장 터키행진곡이 배경으로 흘렀다. 팔들이 선율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고 엉키고 풀렸다. 때로는 다섯 팔이 함께 나아오고 때로는 일곱 팔이 동시에 멈췄다가 물러났다.

1분 27초 만에 완성된 해장국을 들이키면서, 석범은 로봇채널 <보노보>를 켰다.

스포츠 전문 로봇 아나운서 크로스(Cross)의 속사포 중계가 귀를 파고들었다.

"지금부터 <보노보> 개국 기념 빅 이벤트, 글라슈트와 무사시의 경기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두 로봇은 상암동 격투기 전용 경기장에서 열리는 '배틀원 2049'에도 이미 초청되었습니다. 누가 먼저 기선을 제압할까요. 주요 전적에선 무사시가 월등히 앞섭니다만 사이스트 차세대로봇연구소 최볼테르 교수팀에서 심혈을 기울인 글라슈트 역시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녔습니다."

그 순간 링 밖에 서서 고함을 질러대는 사내가 클로즈업 되었다. 낯이 익었다.

"어어."

석범은 콩나물 대여섯 가닥을 머금은 채 숟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지난 밤 바디 바자르에서 눈길이 마주쳤던,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잘 살펴. 무릎과 허리!" 라고 말한 그 남자였다.

최볼테르? 격투로봇 전문가였구나.

무대 아래에서 열광하던 뚱보와 꺽다리도 보였다. 두 사람은 허공에 글라슈트의 설계도를 띄워놓고 마지막 점검이 한창이었다.

저 세 사내가 한 팀이라면 혹시……?

화면을 톡톡 쳐서 글라슈트 팀 주변을 살폈다. 철문을 열고 키 큰 두 여인이 경기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앞선 여인의 얼굴을 확대했다. 오뚝한 콧날과 가닥가닥 꼰 머리카락. 바디 바자르의 메두사, 파도 타는 검은 무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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