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배부른 실직자

  • 입력 2009년 1월 18일 19시 55분


하루라도 자리를 비우면 책상이 없어졌을까봐 걱정하는 직장인에게 ‘노동유연성’이란 겁나는 단어다. 해고가 자유로워야 고용도 자유로워진다니, 둘 다 겪어보지 않고서야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 노동유연성에 고용안정성을 합친 말이 유연안정성(flexicurity)이다. 1994년 처음 도입한 덴마크에선 매년 세 명 중 한 사람은 일자리를 바꿀 만큼 실업을 겁내지 않는다. 정부가 실업급여를 주고 재취업을 위한 맞춤훈련까지 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도 덴마크의 실업률은 4% 안팎, 프랑스의 절반에 불과하다.

▷유연안정성 성공의 이유로 전문가들은 강한 노조, 상대적으로 고른 임금 등을 꼽는다. 하지만 더 중요한 요인은 실업자가 반드시 구직활동을 치열하게 하거나 재취업을 위한 훈련을 받아야만 실업급여를 준다는 ‘엄한 사랑’에 있다. 1996년 “우리가 알고 있는 복지는 끝났다”며 제도를 개혁한 미국도 마찬가지다. 햄버거를 뒤집더라도(우리식으로 하면 ‘막노동을 하더라도’다) 일단 일을 해야 삶의 자세가 달라지고, 기술이라도 배워야겠다는 각오가 생긴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실업급여제도는 엉성하고도 인심만 좋다. 취업훈련을 꼭 받아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구직활동을 했다는 증명도 명함 정도로 가능하다. 지난달 서울지방노동청 남부지청에 구직을 의뢰한 실직자가 5228명이었는데 이 중 25.4%만 취직했고 나머지는 두 달도 안 돼 회사를 그만뒀다. “연봉(2000만 원)이 적다” “회사가 멀다” “화장실에 세면대가 부족하다” 등 이유 같지 않은 이유도 많다. 남부지청에서 “일부 실업자들이 아직 덜 급한 것 같다”고 할 정도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해 사회적 안전망은 더 확대돼야 한다. 복지 사각지대를 없애고 정교한 직업알선과 맞춤훈련을 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구직활동을 제대로 하든 말든, 알선받은 직장을 다니든 말든, 취업훈련을 받든 말든 ‘법적 요건’만 되면 실업급여를 주는 건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전국에 9만여 개의 일자리가 있어 구직자들이 조금만 눈높이를 낮추면 취업이 가능한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복지제도에서도 ‘엄한 사랑’은 꼭 필요하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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