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円貨가 금융위기에 강한 이유

  • 입력 2008년 10월 26일 20시 02분


한국 주가만 폭락한 것이 아니다. 3년 3개월 만에 코스피지수 1,000 선이 허무하게 무너진 24일, 일본 닛케이평균주가는 5년 5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코스피 하락률(10.57%)엔 못 미치지만 일본 증시 사상 다섯 번째인 ―9.6%라는 수치도 공포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주가가 떨어진 이유도 한국과 비슷하다. 환금성이 높은 일본 주식을 처분해 달러를 확보하려는 외국인투자가들의 매도 공세를 일본의 기관투자가와 개인이 견뎌내지 못했다. 미국의 경기가 나빠지면 대미(對美) 수출 비중이 높은 아시아 국가들의 타격이 크리라는 분석도 두 나라 증시에서 동시에 악재로 작용했다.

그러나 국외자의 눈에 비친 일본의 대응에선 그래도 여유가 느껴졌다. 패닉(심리적 공황)이 시장을 덮쳤지만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에 대한 경제주체들의 믿음까지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다. 외국인투자가들은 당장 현금이 아쉬워 일본 주식을 팔아치웠지만 일본 화폐는 앞 다퉈 사들였다. 유례없는 엔화 강세가 그 증거다.

이날 저녁 엔화 가치는 전날보다 7엔가량 오른 달러당 90엔 선에서 거래돼 13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엔화는 글로벌 금융위기 와중에 주요국 통화 중 유일하게 강세다. 유로화를 못 믿겠고 영국 파운드화도 불안한 국제 자본이 최후의 안전자산으로 일본 돈을 선택한 것이다. 원화가치와 주가가 동반 하락해 국가 부도의 악몽에 떨어야 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요즘 일본 경제 전문가들이 걱정하는 시나리오는 엔화 강세로 일본 기업의 수출이 위축되면 수익이 줄어 전체 경기가 침체에 빠지는 것이다. 앞으로 닥칠 상황에 대한 염려라는 점에서 하루하루 버티기조차 힘겨운 다른 나라들의 고민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일본 경제의 여유는 기업과 금융회사들이 ‘잃어버린 10년’을 견디며 내실을 다진 저력이 발휘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은행들이 외환위기 이후 대규모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것처럼 일본 금융회사들도 거품이 꺼져 부실이 불어나자 공적자금으로 연명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무려 12조3000억 엔이 일본 금융권에 투입됐다. 주요 은행들은 이익이 날 때마다 정부 지원금을 갚고 빈 금고를 채우면서 합병을 통해 덩치를 키웠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글로벌 투자은행(IB)이 매물로 나오자 일본 자본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미쓰비시UFJ가 모건스탠리 지분 20%를 사들였고 노무라증권은 리먼브러더스의 알짜로 꼽히는 유럽과 아시아 법인을 인수했다.

한국의 은행들은 공적자금 덕에 튼튼해진 재무구조를 바탕으로 경기가 좋을 때는 한 해 수조 원의 이익을 내면서도 미래에 대한 준비는 소홀했다. 경영진은 노조와 결탁해 봉급을 편법 인상하는 데 실력을 발휘했지, 자발적인 합병으로 규모를 키워 글로벌 금융질서 재편에 대비한다는 메가뱅크 구상은 구호에 그쳤다.

금융에서도 역사는 돌고 돈다. 일본 자본이 할리우드 영화사를 사들인 1980년대 세계 1위의 IB인 골드만삭스조차 스미토모은행의 출자를 받았다.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진 1990년대 골드만삭스는 이 은행의 투자자로 나섰다. 그리고 2008년, 세계 금융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일본은 다시 중심부로 진입했다. 실패에서 배우고 체력을 키운 덕이다. 가까운 곳에 반면교사를 두고도 한국은 여전히 배우지 못하고 있다.

박원재 논설위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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