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평중]극단의 시대

  • 입력 2008년 10월 15일 02시 57분


총체적 위기상황이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파장이 어디까지 갈지 어떤 전문가도 확실한 진단을 못 내린다. 경제학자들은 무력감을 되씹고 당사자인 미국 정부조차 허둥댄다. 금융공황의 전조가 확산되고 ‘백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전(全) 지구적 시장실패가 야기되고 있는 것이다. 만연한 불확실성과 신뢰의 상실은 경제주체들의 심리공황을 낳는다. 외환위기 때의 기억이 생생한 우리의 경우 두려움이 더 클 수밖에 없다. 혼돈에 빠진 외환시장은 그 생생한 증거다.

‘카지노 자본주의’로 불리기도 했던 투기성 금융자본주의가 낳은 천문학적 부실의 규모를 아무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위기의 실체에 대한 진단이 부재할 때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올 리 없다. 세계공황의 공포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는 건 이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고난과 영광에 찬 시장경제의 역사는 시장이 자신의 실패를 교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총력 대응을 개시했기 때문에 지금의 위기는 언젠가는 진정될 것이다. 여기서 경제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한 가지 사항이 있다. 금융위기가 제어된다고 하더라도 실물경제의 위축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길고 긴 경제 한파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파국과 번영 교차하는 현대사

하지만 시야를 넓혀 보면 전면적 위기조차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영국 역사학자 홉스봄은 20세기를 ‘극단의 시대’라 불렀다.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광영과 모순이 쉴 새 없이 교차하는 현장이 바로 현대사라는 것이다. 미증유의 인명살상을 가져온 두 번의 세계대전, 대공황, 볼셰비즘과 파시즘의 대두, 전 세계적 경제발전과 생산력 증가, 공산주의의 몰락, 민주주의와 세계화의 진전 등이 예시된다. 한마디로 현대의 역사는 음울한 파국과 찬란한 번영이 뒤섞인 극단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세계체제의 변화와 긴밀히 이어져 있는 한반도 상황을 전망하는 데도 한국판 극단의 시대라는 개념은 매우 유용하다. 국권 상실, 광복과 분단, 건국과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경제위기와 북핵 사태 등 한국 현대사의 압축적 성과가 온갖 모순의 과잉 축적과 동행하기 때문이다. 성취와 발전에는 문제와 위기가 따라붙기 마련이다. 성취가 놀라울수록 문제의 심각성도 극단적으로 커진다.

현대 한반도 문제 상황의 본질을 가리키는 극단의 시대는 크게 두 가지 극단의 과제를 우리에게 던진다. 하나는 지금의 경제위기를 포함한 사회경제적 도전이다. 제2의 외환위기로 비화할 수 있는 개연성을 차단해 민생을 안정시키는 게 초미의 과업인 것이다. 여기서 ‘시장 혹은 국가’의 이분법이 아니라 ‘시장과 국가’의 협력이 긴요하다는 것이 상식이다. 특히 경제위기 국면에서 실패로 치닫는 시장을 관리하고 이끄는 국가의 기능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명박 정부의 사회경제정책은 시대의 흐름과 동떨어져 있다. 외환관리 실패는 말할 것도 없고 토건국가적 성장에의 집착, 극소수 상위계층을 위한 경제정책 추구, 미국의 재앙을 보면서도 강행하는 금산분리 완화, 퇴행적 언론정책, 소모적 이념논쟁, 진정한 소통의 부재 등 일일이 예거하기도 벅찰 정도다. ‘신뢰가 제일 중요하다’는 대통령의 거듭된 호소가 대다수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건 그 자연스러운 결과다.

한국판 극단의 시대가 야기한 또 다른 극단의 과업은 ‘북한문제’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핵 게임과 냉·온탕을 오가는 남북관계의 관성은 북한문제의 실체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무디게 만들었고, 분단체제가 영속될 것이라는 집단적 착각을 일반화시켰다. 그러나 거품으로 가득 찬 금융자본주의의 추악한 실상이 금융위기를 통해 드러나듯, 김정일 와병설은 햇볕론의 소망사고(所望思考)가 왜곡한 북한문제의 실체를 섬광처럼 폭로한다. 현재의 북한이 실패한 체제이고 북핵 위기는 그 산물이며 포스트 김정일시대가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특정 정권의 이해관계에 따른 남북관계의 부침(浮沈)보다 훨씬 중요한 게 김정일 이후의 한반도에 대한 중장기적 비전이다.

경제위기-北문제 냉철한 접근을

이명박 정부는 극단의 시대라는 폭풍우를 헤쳐 나갈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상처 입은 시민들을 껴안는 사회경제정책과 북한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냉철한 접근이 절실하다. 흩어진 국민의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거국통합내각을 구성해서라도 현재의 위국을 관리하고 미래의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 극단의 시대는 극단의 대응을 요구하는 것이다.

윤평중 객원논설위원·한신대 교수·사회철학 pjyoon56@kor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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