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산업은행의 ‘한국형 IB’ 실험

  • 입력 2008년 9월 28일 19시 40분


산업은행이 리먼브러더스 인수 문제로 홍역을 치른 와중에도 재계의 은밀한 시선은 산은 M&A(인수합병)실과 기업금융 4실에 쏠렸다. 올해 M&A 시장의 ‘최대어(最大魚)’인 대우조선해양의 매각을 담당하는 부서다. 다음 달 13일 본입찰을 앞두고 실무자들이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보안이다. 총성 없는 전쟁으로 불리는 M&A전의 승패가 정보에 달린 점을 감안하면 무리가 아니다. 예비입찰을 통과한 GS 포스코 현대중공업 한화가 정보 수집에 혈안이 돼 있는데도 별 잡음이 없는 것을 보면 보안작전은 일단 성과를 거둔 것 같다.

조선 경기에 대한 전망이 엇갈리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액화천연가스(LNG)선 건조기술을 보유한 대우조선은 매력적인 매물이다. 사업 분야가 플랜트 에너지 기계로 다양해 연관산업과 시너지 효과도 크다. 매각 결과는 국내 재계 서열을 바꾸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세계 조선업계 판도에도 큰 파장을 미친다.

산은은 매각 주간사회사로 미국계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를 선정할 계획이었지만 기술유출 논란이 불거지자 자체 인력을 동원해 직접 맡았다. 글로벌 IB에서 곁눈질로 배운 M&A 기법을 이참에 실전에서 익히겠다는 심산이다. 국제 M&A 관례로는 ‘당돌한 도전’이다. 산은이 리먼 인수 협상을 벌이기 전만 해도 미국 언론은 산은을 ‘한국의 작은 은행(South Korea small bank)’이라고 불렀다. 그 스몰 뱅크가 세계 3위 조선업체의 매각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이 산은의 리먼 인수에 제동을 건 것은 금융당국 책임자로서 할 일을 한 것이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산은의 신용은 곧 한국 정부의 신용으로 통한다. 금융자율이 존중되는 시대라도 국부(國富) 유출의 위험이 있고 국가신인도와 직결되는 문제에 당국자가 뒷짐을 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상업적인 거래인 대우조선 매각에 훈수를 두는 것은 정당한 직무의 범위를 넘어설뿐더러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 소지가 크다. 그는 지난달 “대기업들이 과다한 차입을 통해 인수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달엔 “지분 매각에서 적정 수준의 외자 유치를 모색하겠다”고 했다. 기업 자금사정이 걱정스럽고 달러 확보도 절실했을 것이다. 하지만 발언이 나올 때마다 M&A의 공정성은 상처를 입는다. 매각 결과가 훗날 정치적 공방의 대상이라도 되면 한국형 IB를 지향하는 산은의 꿈은 꺾이게 된다.

기업이 시장의 룰을 지켜야 하듯 당국도 절제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 정부와 집권 여당이 일제히 리먼 인수를 시도한 민유성 산업은행장을 몰아붙이자 후유증은 엉뚱한 데서 나왔다. M&A를 통한 글로벌 금융그룹 도약을 외쳤던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이 훨씬 좋은 조건의 매물이 나와도 눈치만 봤다. 그러는 사이에 골드만삭스는 워런 버핏의 투자로 기력을 되찾았고 일본의 미쓰비시UFJ는 모건스탠리 지분을 사들였다.

일부 IB의 파생상품 투자 실패를 빌미로 ‘IB 무용론’까지 나오지만 M&A 중개 같은 분야는 한국 금융이 계속 배우고 도전해야 할 영역이다. 굵직한 기업이 줄줄이 매물로 대기 중인 한국 상황에선 M&A 수수료의 ‘수입대체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산은이 대우조선 매각을 깔끔히 처리한다면 달러가 부족하고 금융위기가 걱정돼 글로벌 IB를 놓친 아픔을 다소나마 달랠 수 있을 것이다.

박원재 논설위원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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