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상영]우리 안의 민주주의

  • 입력 2008년 6월 26일 02시 58분


정확히 21년 전인 1987년 6월 26일 나는 서울시청 뒤 무교동 앞길에 있었다. 점심시간에 쏟아져 나온 직장인과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이 뒤섞여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그리고 지금 세대에는 이름조차 생소한 악명 높은 ‘백골단’(사복 전투경찰)이 시위대를 쫓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 대학생이 구호를 외치면 백골단이 쫓고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이 길을 막는 숨바꼭질이 한동안 반복됐다. 얼마 후 대학생들은 차도로 내려가 일제히 드러누웠다. 누운 채로 어깨동무를 하고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를 외쳤다. ‘사과탄’(최루탄의 일종)이 터지고 백골단이 학생들을 폭행하며 연행했다. 직장인들이 항의했다. 누군가 “때리지 마”라고 말하자 이윽고 군중의 합창으로 증폭됐다. 모두 “때리지 마”라고 외쳤다. 이른바 넥타이 부대의 시위 합류 현장이었다. 최루탄으로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된 채 취재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대선 직후마다 정권퇴진 외칠건가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후보가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3주 가까이 계속되던 시위는 일단락됐다.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국민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국민의 힘으로 이룩한 민주화였다.

당시 대학가에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최루탄이 난무했다. 백골단은 누가 보건 말건 시위대를 늘씬 두들겨 패면서 잡아갔다.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가 보도되면 언론인들도 정보기관으로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사람들은 ‘내 자식은 더 좋은 나라에서 살게 하고 싶다’고 염원했다. 이런 염원이 ‘6월 민주항쟁’으로 분출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민주화를 이루었다. 몇 번의 정권교체 경험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각각의 마음속에 내재된 의식까지 민주화되었는지는 별도로 따져봐야 할 문제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충분치 않고 구성원들의 생각과 행동에 따라 얼마든지 변질될 수 있을 만큼 취약하다.

독재정권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억압했다. 정권과 똑같이 생각하도록 획일화된 사회를 강요했다.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의견이 존중받는 사회를 원했다. 이제 우리는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다. 누가 엿듣지는 않는지,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21년 전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은 옳고 그름의 문제였다. 그래서 거리시위는 물론 때로는 폭력시위까지도 국민으로부터 용인됐다. 요즘 우리 사회에 진행되고 있는 논의는 옮고 그름이 아니라 의견 차이의 문제다. 정부의 쇠고기 협상은 잘못됐다. 여기에 항의한 초기 촛불시위는 순수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대다수 군중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아직도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은 정치적 반대세력일 뿐이다. 반대 의견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정권퇴진을 운운하고 국민의 이름으로 정부에 명령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이룩한 민주주의 사회는 구성원 각각의 의견을 존중하되 투표를 통해 합의를 도출해가는 시스템으로 움직인다.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5년 후, 10년 후 정권은 또다시 바뀔 수 있다. 그때마다 정치적 반대세력이 정권퇴진 운동을 벌인다면 이 사회가 유지되겠는가.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법 익혀야

2008년 6월 우리는 민주화를 쟁취한 지 21년이 됐지만 민주주의의 기반은 아직도 매우 취약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핍박하는 것이 정당하게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반대파를 억압할 수 있는 풍토라면 독재정권은 언제라도 다시 출현할 수 있다. 임지현(한양대) 교수 등이 제기한 ‘우리 안의 파시즘’은 없는 것인지 각자가 성찰해 봐야 할 것이다.

목표와 수단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더 나은 사회를 원한다. 하지만 내 방법만이 옳다고 믿는 것은 위험하다. 설사 자신의 방법에 대해 확신이 있더라도 투표에서 지면 승복하고 다음 선거까지 참아야 한다. 의견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방법을 아는 것, 싫어하는 사람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 이것이 우리가 21년 전 바라던 민주사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김상영 편집국 부국장 you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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