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정위용]동유럽 민주주의 흔드는 포퓰리즘

  • 입력 2008년 6월 12일 03시 04분


올해 체코 프라하의 봄은 연립정부의 개혁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로 얼룩졌다.

체코 최대 노동자 단체 중의 하나인 모라비아노동자연맹(CMKOS)은 5월 14일부터 거의 매주 프라하 시내 정부청사 앞에서 의료와 교육정책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이번 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체코 초·중등 교직원 13만여 명은 9일 저임금에 항의하는 동맹 파업에 들어갔다. 온드르제이 리슈카 교육부 장관이 파업을 벌이는 학교를 찾아가 교사들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같은 날 노동자 단체 회원들과 함께 정부청사 앞으로 몰려나온 시위대는 “교사 월급을 올리기 위해 2억 달러 추가 예산 배정을 정부에 요구했지만 고작 15%만 반영됐다”며 미레크 토폴라네크 총리를 비난했다.

그러나 체코 정부는 교사 월급을 대폭 올려줄 만큼 재정이 넉넉하지 않다. 체코의 올해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재정적자는 아직도 국내총생산(GDP)의 3%를 웃돌고 있다.

이 같은 재정적자의 주범으로는 포퓰리즘 정권이 지목된다.

토폴라네크 총리가 이끄는 시민민주당(ODS)은 소득에 관계없이 세금을 똑같이 부과하는 일률과세 정책을 내세워 권력을 잡았다. 이 정책은 고소득자와 자영업자에게서 환영을 받았지만 국고는 점점 비어 갔다. 이로 인해 뒤늦게 허리띠를 죄는 정책이 나왔지만 이 때문에 길거리 시위는 그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ODS보다 앞서 집권당이었던 사회민주당(CSSD)도 ‘복지와 번영’이라는 구호 아래 노동자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을 남발해 혈세를 낭비했다.

체코와 함께 동유럽 자본주의화의 모범생으로 꼽혔던 헝가리와 폴란드도 정치지도자들이 ‘포퓰리즘 선명성 경쟁’을 벌이는 형국이다.

헝가리 사회당은 2006년 총선 당시 ‘무상 교육, 무상 진료’를 내세우며 복지 수준을 한 단계 높이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헝가리의 재정적자가 유럽연합 최고 수준인 GDP의 10%대에 이르자 사회당은 말을 바꿔 긴축정책에 들어갔다. 사회당에 못지않은 선심 정책을 펼치며 ‘헝가리의 젊은 포퓰리스트’로 불렸던 빅토르 오르반(현 청년민주동맹 당수) 전 총리 는 이제 시위대를 이끌고 정권 퇴진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 지역 전문가들은 동유럽 포퓰리즘이 대중을 동원하는 방식을 제외하면 이제 중남미를 능가한다고 진단한다. 동유럽 출신의 프랑스 정치학자 자크 루프니크 씨는 최근 “동유럽 포퓰리즘이 대의민주주의, 법치, 언론 자유와 같은 민주제도의 근본 가치까지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방향을 잃은 개혁과 길거리 시위의 악순환은 시민들의 정치의식에도 해악을 끼치고 있다. 루프니크 씨의 조사에서 2년 전 시위대의 바리케이드 방화와 언론사 습격을 목격한 폴란드인의 80%가 의회 무용론을 폈으며, 65%는 “민주주의가 법질서를 수호할 수 없다”고 응답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옵서버 특파원이었던 닐 애처슨 씨는 올해 1월 “프라하에서 만난 젊은이 대부분이 과거의 사건과 가치에 대한 기억을 상실했다”고 한탄했다. 그는 “부모 세대들이 과거의 좋은 얘기만을 골라 전달하는 바람에 젊은이들이 과거에 대한 ‘선택적 망각 현상’에 빠져 있다”고 꼬집었다.

서방 학자들은 동유럽의 포퓰리즘이 과거 역사의 올바른 평가나 다른 나라의 지원으로도 치유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오늘날 동유럽 국가들의 포퓰리즘은 프라하의 봄을 진압했던 소련군 탱크보다 더 무서운 ‘내부의 적’이 되어가고 있다.

정위용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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