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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4월 9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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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지적재산권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확산된 지는 10년이 채 안 된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크래킹해서 사용하고, 대학에선 원서 복사본으로 공부하고, LP 해적판을 즐겨 듣던 때가 불과 몇 년 전이다. 아직 영화나 음반,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좀 더 확실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지만 창작자의 지적재산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특허 출원 건수가 세계 7위 안에 들고 영화나 드라마, 컴퓨터 게임 등 다양한 지적 결과물을 수출해 국가적 차원에서 부를 창출하고 있는 현실도 매우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지나친 특허주의를 경계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몇 해 전 정부는 산업기술유출방지법을 통해 과학기술자들의 전직을 제한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이 시도가 과기인들의 반대에 부닥치자 요즘에는 퇴직 시 ‘동종업계로 전직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는 방식으로 회사 차원에서 교묘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해외로 전직하는 경우에는 국가정보원까지 나서서 조사할 정도다.
‘기술자=잠재적 스파이’ 인식 잘못
기술 유출을 막는다는 이유로 동종업계로의 전직을 제한하는 것은 모든 과학기술자들을 특허를 실어 나르는 수단쯤으로 보거나 잠재적 산업스파이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 지금 일하는 곳에서 적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과학기술자들에겐 어떤 선택권이 있는 걸까. 그들이 동종업계로 가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일하란 말인가. 마치 프로야구 구단들이 전력 노출을 이유로 선수들의 팀 이적을 막는 것과 같다고나 하겠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통한 기술적 우위도 대체로 5년이면 따라잡히는 초고속 과학기술 발전 시대에 우리가 가장 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특허권이 아니라 사람이다. 중요한 전문지식을 가진 과학기술자들이 다른 기업으로 이직하는 것을 막으려면 그들에게 더 좋은 대우를 해주면 된다. 과학기술 분야를 제외하곤 어느 분야에서나 경험이 풍부하고 실무 노하우를 많이 쌓은 전문가들은 좋은 조건으로 이직할 수 있다.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선 공장들 사이에서 ‘숙련된 노동자 빼오기’나 ‘산업스파이 활동’이 공공연히 벌어지곤 했다. 그래서 영국에선 ‘숙련 노동자 이주 금지령’이란 제도가 1825년까지 존재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교수의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따르면 지식을 체화하고 있는 노동자들로부터 분리해 누구나 도면만 보면 복제할 수 있는 지식 자체를 보호하는 ‘특허법’이 부각되면서 숙련된 노동자들의 이주를 막는 법이 폐지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거꾸로 대한민국에선 특허법이 강화되면서 ‘산업스파이 방지’라는 명목하에 과학기술자들의 전직이 제한받고 있는 것이다.
미국 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기발한 생각은 공기와 같아서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특허권에 반대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는 인간을 소유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믿었으며 실제로 많은 노예를 소유했다.
기술 때문에 사람 묶어둬선 안돼
21세기 우리는 제퍼슨과 정반대로 행동해야 한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술은 특허권으로 보호하되 사람은 소유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지식이 자산으로 인정받고 있는 시대에 오히려 과학기술자는 그의 오랜 경험과 전문지식으로 인해 사회적 가치가 더욱 높아져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지금부터라도 산업스파이의 기술 유출 활동과 과학기술자의 정당한 이직을 성숙하게 구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과학기술자들은 지적가치를 창출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정재승 객원 논설위원·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 jsjeong@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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