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전상인]‘앵그리 사회’의 경제 살리기

  • 입력 2008년 1월 2일 02시 52분


2주 전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서울 구로구나 관악구 등 전통적으로 진보정치의 기반이 강한 지역에서 모처럼 압승을 했다. 현 정부에 대해 크게 실망한 서민들이 ‘경제 대통령’을 자임한 이 후보를 다급히 선택한 결과로 풀이된다. 물론 정권교체를 갈망했다는 점에서는 부자 동네 강남 사람들이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강남구 압구정, 도곡, 대치동의 경우 이 후보 지지율은 구로, 봉천, 신림동에 비해 두 배가량이나 높았다. 그 같은 편차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살리자’는 시대정신에 따라 서울의 대표적인 ‘계층 양극화 전선’이 대선 과정에서 표심(票心) 일치를 보인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약속이 막상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전개될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이는 결코 새 정부의 의지나 능력을 의심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나라 국민의 사회적 심성이 오늘날 결코 예사롭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보릿고개가 태산보다 높았던 수십 년 전의 ‘헝그리(hungry) 시대’라면 정부가 나서서 경제를 살린다는 게 차라리 쉽고 간단했다. 경제 성장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하 한국사회는 미증유의 ‘앵그리(angry) 시대’다. 지금의 경제 살리기는 단순한 호구지책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기적도, 공짜도 없다’ 설득 필요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자랑하는 세계 굴지의 경제대국임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통계청 발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가운데 현재의 소득에 만족하는 비율은 10%에 불과했다. 그 대신 소득분배 측면에서 불공평하다는 응답은 76.9%에 이르렀다. 자신을 중산층으로 여기는 비율 또한 최근 30% 이하로 급락했다는 것이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조사 결과다. 한편 2007년도 한길리서치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부자 커트라인’은 27억6000만 원이었다. 적어도 그만큼은 가져야 부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실제 그런 가구는 전체의 1%에도 훨씬 못 미치기에 나머지 국민은 열등감, 좌절의식 혹은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다. 최근 종합부동산세 논란에서 보듯이 ‘부자 경계선’을 넘었음직한 강남 부자들도 나름대로는 불만이 있다.

성난 사회의 거친 민심은 고도성장 시대의 종언, 민주화에 따른 평등의식의 확대, 1997년 외환위기 및 그 이후 빈부격차의 구조적 심화 등이 쌓이고 어울린 결과다. 하지만 ‘앵그리 사회’의 좀 더 직접적인 원인은 역시 ‘진보의 시대’ 10년이 제공한 것이 아닐까 싶다. 좌파적 정권의 등장을 가능하게 했던 모태가 바로 사회적 불평등과 상대적 박탈감이었고, 집권한 다음에는 그것들이 정치적 의도와 경제적 무능에 따라 부단히 확대 재생산돼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 정부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낙오자나 패배자로 전락한 실제 현실, 혹은 최소한 그렇게 느끼며 사는 가상현실과 대면할 수밖에 없다.

‘앵그리 사회’의 한복판에서 이명박 정부의 경제 살리기가 성공하려면 우선 당장의 안락과 대중의 희망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의 유산과 악습을 끊어야 한다. 경제에는 어떠한 기적도, 우연도, 공짜도 없다는 만고의 진리에 대해 처음부터 국민과 소통해야 한다. 그런 게 되지 않고도 경제문제에서 성공할 수 있는 정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또한 지금처럼 온 나라가 ‘경제 대통령’의 ‘경제 살리기’에 집중하는 모습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칫 인간의 행복이란 오로지 경제에 달렸다는 생각을 강화함으로써 현재의 ‘앵그리 사회’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당선된 이상 경제 대통령은 어디까지나 대통령직 일반의 하위개념일 뿐이다.

성장과 ‘국민 화목’ 함께 이뤄내야

물론 현실적으로 경제 살리기가 급하고 바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럴 때 이명박 정부는 그것의 실질적 혜택이 서민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게 먼저 돌아가도록 각별히 배려해야 한다.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경제 살리기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하는 것은, 싫든 좋든 ‘앵그리 사회’의 국정을 맡게 된 새 대통령의 시대적 책무다. 이명박 정부는 보수우파가 진보좌파에 비해 경제 성장은 물론 사회 통합에도 더 많이 기여했다는 총체적 평가를 기대해야 한다. 반드시 살려내야 할 것은 죽은 경제만이 아니라 계층을 초월한 국민 전체의 화목과 행복감이다.

전상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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