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태진]인문학 강국 부활을 위하여

  • 입력 2007년 10월 10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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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한국학술진흥재단과 전국 인문대 학장단은 인문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제1회 인문주간을 선포했다. 올해부터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가 민족사에서 가장 빛나는 인문적 업적이란 사실을 새겨 한글날이 있는 주간을 인문주간으로 삼기로 했다. 국민과 함께하는 행사로 이끌 의지를 담은 결정이다. 올해는 이 기간에 전국 주요 대학과 연구기관 시민단체 방송사가 총 130건의 행사를 마련했다. 늦게나마 이런 노력이 강구돼 천만다행이다.

국내에서 1960년대 경제개발이 시작됐을 때 인문학은 없었다. 모두가 과학기술 경제학 경영학에 몰려 인문학은 뒷전이었다. 1990년대 후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무렵부터 변화가 나타났다. 이 무렵 우리 사회에 문화란 말이 홍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음을 기억할 것이다.

OECD 대열에서 과학기술과 경제는 필수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각자의 문화적 역량으로 창의성 싸움을 해야 살아남는다. 이 대열에 들면서 문화적 역량이란 것 때문에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지금 창조경영과 감성경영이 회자되고 참살이(웰빙)란 신조어가 등장한 것이 모두 이 흐름의 선상에 있다.

그런데 이즈음 인문학의 위기라는 다른 유행어가 등장했다. 인문학의 용도가 이렇게 높아졌는데 무슨 말인가. 아마도 인문학이 기대하는 만큼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이 담긴 말일지 모른다.

사회적 수요관계로 보면 인문학은 지금 ‘비상’이 걸린 상태지 위기라고 하기는 어렵다. 인문학 몇 분야가 비인기 학과로 없어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사태는 학부제가 성급하게 도입돼 빚어진 ‘사고’였지 한국 인문학의 어떤 약점 때문이라고 보지 않는다. 세계화 시대에 불문학, 독문학이 비인기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물론 인문학도 바뀌어야 할 점이 많다. 지식 전달의 매체가 책에서 컴퓨터로 바뀌었는데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19세기 부르주아 계층과 함께 발달한 대학은 지식의 권위를 몹시 중시했다. 거기서는 지식의 일방적 권위가 가능했다. 그러나 사이버 세계의 대중은 이를 거부한다.

대학도 세태 변화로 지식의 권위를 이어갈 후대 양성소로만 기능할 수는 없게 됐다. 적어도 교육체계만은 바뀌어야 지탄을 면할 상황이다. 예컨대 독어문학과 학생이면 독어문학에 유럽의 역사 경제 정치 경영 등의 과목을 연계해 취업에 도움이 되는 교육을 받는 체제가 필요하다.

서울대는 인문학 사회지도자 과정을 처음 도입했다. 경영학에서 20여 년 전에 도입된 제도다. 한 달 반밖에 안됐지만 출석률 90%로 순항 중이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중소기업 오너, 고위 관료 출신, 의사 등 전문직으로 구성된 학생들의 열의는 뜨겁다.

3주째에 가졌던 안동지역 서원문화 답사는 서로를 뜨겁게 만나는 계기가 됐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 격퇴에 앞장선 이곳 사람들이 신 농업기술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 지방 유교문화의 기반이 됐음을 설명했을 때 학생들은 모두 긴장했다. 병산서원의 격조 높은 건축미,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박물관에 높게 진열된 목판 앞에서 문화적 자부심을 느꼈다는 소감이 많았다.

서울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유교는 버려야 할 유산인 줄 알았는데 우리 사회의 혼탁을 씻어 줄 방안을 전통에서 찾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안은 채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한국이 인문학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가. 한국은 100년 전만 해도 최고의 인문학 강국이었으므로.

이태진 서울대 인문대학장·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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