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위대한 컬렉터들

  • 입력 2007년 3월 3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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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컬렉션을 이끈 사람들▼

안평대군,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탄생시키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컬렉터는 조선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1418∼1453)이라고 할 수 있다. 시서화(詩書畵)에 능했던 안평대군은 자신이 꿈에서 본 도원(桃源)을 안견에게 얘기해 그 유명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리게 한 주인공이다.

안휘준(한국회화사) 명지대 석좌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안평대군의 컬렉션은 조선과 중국의 명화를 망라해 모두 222점에 이른다. 이원복(한국회화사) 국립전주박물관장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고려 말 중국을 드나든 사람들이 가져온 명화와 노국공주가 공민왕에게 시집올 때 가져온 작품 등이 조선 왕실로 넘어오면서 이를 소장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추정했다.


巨富김광국의 수집 열정, 위대한 화가를 낳다

17세기 말을 지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골동품이나 글씨 그림을 수집해 감상하는 분위기가 확산되었다. 도둑이 자신의 컬렉션을 훔쳐갈까봐 이를 지키느라 잠 못 드는 사람, 좋은 그림을 보면 입고 있던 옷을 팔아서라도 끝내 구입하고 마는 사람, 먼 길을 마다하고 중국에까지 가서 그림을 사오는 사람…. 사치스러울 정도로 고동서화 수집 열기가 대단했다. 이 같은 수집 열기는 주문 생산으로 이어져 작가들의 창작 욕구를 북돋아 주었고, 감식안과 비평 능력을 지닌 컬렉터들이 등장하면서 미술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컬렉터들이 후원자(패트론) 겸 비평가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 같은 위대한 화가가 탄생할 수 있었고 결국 18세기 문화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18세기 최고의 서화 컬렉터는 중인 츨신의 거부였던 김광국(1727∼1797)이란 인물이었다.

간송, 일제강점기 민족문화 수호 운동에 앞장서다

일제 강점기, 문화재 미술품 수집은 더욱더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제에 의해 우리 민족 문화를 약탈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자 문화재의 일본 유출을 막기 위해 수집에 나선 사람들이 등장했다. 기미독립운동 33인의 한 사람이자 서화비평가였던 위창 오세창(1864∼1953)과 당시 최고의 부호 출신인 간송 전형필(1906∼1962)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전형필은 오세창에게서 문화재의 가치와 감식안을 배워 그의 나이 20대 말인 1930년대부터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의 컬렉션은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비롯해 훈민정음 해례본, 고려 청자, 조선 백자 등 한국 최고 명품을 총망라한다.

고려 청자 가운데 최고 명품으로 꼽히는 국보 68호 청자상감구름학무늬매병은 그가 1935년 2만 원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당시 좋은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정도였다. 만일 이 청자가 지금 거래된다면 수백억 원을 능가할 것이다.

이병철… 한광호… 대형 컬렉터들, 전문화시대 열다

광복 이후엔 문화재 컬렉션이 늘어나면서 대형 컬렉터가 등장했다. 바로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문화재를 수집하던 이 전 회장은 1960년대 들어 컬렉션에 각별한 관심을 쏟으면서 전국 곳곳의 명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현재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된 약 2만 점의 컬렉션은 양적인 면이나 질적인 면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최고 수준이다.

어느 한 분야의 미술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하는 컬렉션도 늘어났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탕카(티베트 불화)에서 세계 최고 컬렉터로 꼽히는 한광호 한빛문화재단 이사장. 그는 1980년대부터 동서양을 누비며 총 2000여 점의 탕카를 모았다. 이 밖에 도자기로 유명한 윤창섭 성보 문화재단 이사장, 자수와 보자기 컬렉터인 허동화 한국자수박물관장, 근대 회화 컬렉터인 금성출판사의 김낙준 회장, 석조물 컬렉터인 천신일 세중그룹 회장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전문 컬렉터들이다.

한편 현대미술 컬렉터로는 충남 천안시 아라리오 갤러리의 김창일 대표를 꼽을 수 있다. 2006년 미국 미술월간지 ‘아트뉴스’가 선정한 ‘세계의 톱 컬렉터 200인’에 선정되었을 정도로 현대미술 분야의 대표 컬렉터로 꼽힌다. 그는 20여 년 동안 외국 거장들의 작품 2000여 점을 수집했다.

▼아낌없이 기증한 사람들▼

《거액을 투자해 평생 모은 미술품은 컬렉터의 분신과도 같다. 이런 컬렉션을 공공 박물관에 선뜻 기증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컬렉션 기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관건은 자녀들의 동의를 받는 일이다. 유산에 대한 기대감에 차 있는 자녀들이 동의해 주지 않으면 아무리 부모라 해도 자신의 컬렉션 기증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기증 문화 분위기에 힘입어 컬렉션을 사회에 환원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이홍근 - 1000억 원대 선뜻 내놔

1980년 회화 도자기 불교조각 등 국보 보물급 문화재 4900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사업가 이홍근(1900∼1980·사진)은 문화재 기증의 전범을 보여 준 인물로 꼽힌다. 그의 기증품은 모두 그 분야의 최고 컬렉션으로, 현재 시가로 친다면 1000억 원대를 능가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족들은 학술기금을 출연해 한국고고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연구비를 지원해 오고 있다. 또한 매년 학술대회가 열리면 참여자들에게 푸짐한 저녁 식사와 술을 대접하기도 한다.


김용두 - 100억 원대 명화 포함 세 차례

어린 시절 일본에 건너가 기업을 이뤘던 재일교포 사업가 김용두(1922∼2003·사진)는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수백억 원대의 문화재 180여 점을 자신의 고향인 경남 진주의 국립진주박물관에 기증했다. 그의 기증품 가운데 하나인 16세기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는 현재 시가 100억 원으로, 단일 기증품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유창종 - 韓中日기와 1800점 박물관에

마약 범죄를 파헤치는 ‘마약 검사’로 명성을 떨친 유창종(사진) 변호사는 자신이 평생 모은 기와 1800여 점을 200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그의 컬렉션은 한국과 중국 일본을 모두 아우르고 있어 그것만으로도 기와 연구를 충분히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는 또 기증 직후 기와학회를 만들고 학술논문상까지 제정해 젊은 기와 연구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송성문 - 성문종합영어 이익금 환원

‘성문종합영어’의 저자인 송성문(사진) 씨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2003년 국보 246호 ‘대보적경’ 등 국보 4건과 보물 22건을 포함해 100건의 문화재 명품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1960년대부터 베스트셀러 영어 참고서로 번 돈을 모두 투자해 수집한 수준 높은 컬렉션이었다. 그는 특히 기증식에 아들만 보내고 자신은 미국으로 잠시 자리를 피해 많은 사람을 감동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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